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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온난화에 대응해 예술가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혜정(미술이론)

기후 위기 시대에 예술가는 ‘유사(quasi)-환경운동가’ 혹은 ‘유사(quasi)-과학자’를 넘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더구나 매체가 사진이라면, 파괴되어가는 자연 풍경이나 이를 대체하고 있는 거대한 산업 풍경의 ‘기록’이라는 다큐멘터리적 관습에서 벗어나 어떤 종류의 생태학적 작업을 할 수 있을까? 사진에서 생태 미술에 대한 많은 논의가 이렇듯 ‘기록’이라는 사진의 오래된 미학과 환경보호를 위한 카메라의 파수꾼 역할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 이경호 작가는 비닐봉투(plastic bag)를 하늘로 띄우고 이를 촬영한다.
  우리가 흔히 동네 편의점이나 식료품 가게 등에서 물건이나 식품을 구매할 때 간단하게 그것을 담는 용도로 사용하는 비닐봉투를 사진으로 촬영한 이경호 작가의 일명 ‘봉다리 시리즈(작품 제목은 〈어딘가에〉)’는 2006년 시작해 현재까지 지속 중인 프로젝트이다. 대개 한 번 사용하면 버려지는 이 비닐봉투는 가볍고 잘 찢어지지 않으며 무엇보다 무료로 제공되었기에 현대인의 편리한 삶에 가장 크게 기여한 발명품 중 하나가 되었다. 작가는 1980년대 중반 이후 종이봉투를 대체하기 시작해 오늘날 세계 어디서나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또 쉽게 버려지는 비닐봉투라는 물질에 우리의 눈을 고정시킨다. 
  비닐봉투는 대개 폴리에틸렌, 즉 석유를 가공해 만든다. 전 세계적으로 하루에 생산되는 석유량의 약 8퍼센트가 비닐봉투를 만드는 데 사용된다. 19세기의 석탄을 대체할 에너지 자원으로 석유와 수소가 고려됐을 때, 수소보다 개발 비용이 조금 싸다는 이유만으로 석유가 선택되었다는 것과 비닐봉투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그것이 일회용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많지 않다. 
  ‘봉다리 시리즈’에서 비닐봉투는 석유 자원의 무분별한 추출과 분배,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가져온 자원 고갈과 쓰레기 문제, 그리고 마침내 지구 환경 오염으로 이어지는 전 세계적 석유자본주의(petro-capitalsim)의 거대한 연쇄 작동의 종착지로서 일상의 경험을 강조한다. 사진에서 비닐봉투는 공중에 떠 있는 상태로 포착되는데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 노트르담 대성당, 롱샹 성당, 이탈리아의 피렌체 대성당, 피사의 사탑,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광장, 중국 베이징의 만리장성, 시안 대명궁 등 세계 곳곳을 배경으로 하기에 떠도는 모습으로 인식된다. 도처에 유령처럼 출몰하는 이 비닐봉투는 자본주의가 물질을 사용하는 방식, 비닐봉투의 편재성, 그리고 인류의 지난 문명의 역사를 환기하며 지구를 맴돈다. 
  작가는 1980년대 후반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학업과 활동을 이어가다 2000년 귀국했다. 사진, 영상, 퍼포먼스, 설치, 조각 등 다양한 매체를 이용해 삶과 죽음, 돈, 허무, 예술 등에 대한 실험적 작업을 주로 해왔던 작가는 아들의 출생과 작가 본인의 심장 수술을 계기로 2010년 이후부터는 생태학적 작업으로 전면 전환하였다. 이전에도 비닐봉투는 작가에게 중요한 메타포 중 하나로 사용되었는데 작가는 비닐봉투가 빈 채로 태어나 잠시 채워졌다 버려지는 인간의 허무한 인생과 비슷하게 느껴졌다고 말한다. 미술관 구석의 한 공간에 선풍기를 틀고 비닐봉투가 바람에 아무렇게나 날리며 공간을 부유하게 만든 <Traveler>(2006)에서 비닐봉투는 거대한 운명 앞에 힘없이 휩쓸리는 인생의 무력함을 가시화했다. 그러나 지구환경 문제에 집중하게 되면서 비닐봉투에 생태적 의미가 더해졌다. 이후 촬영한 비닐봉투는 조금 더 자유로워진 구성을 보여주는데, 운명적 굴레의 제한된 공간을 공회전하던 것에서 벗어나 기후 위기에 대응하려는 구체적인 방향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봉다리 시리즈’는 사진으로 먼저 제작된 후 같은 제목의 영상 작업과 <지구와 사람>(2019)이라는 또 다른 영상으로 이어졌다. 드론으로 촬영한 이 영상들은 이번에도 세계 곳곳을 떠도는 비닐봉투의 움직임을 추적하며 사진과 동일한 모티브를 반복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지금껏 사진에서 부재했던 인간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큰 변화를 보인다. 그중 작가의 출현은 풍경의 일부로 촬영된 무명의 사람들의 분주한 움직임 사이에서 부동의 자세로 홀로 멈춰 서 있음으로써 작가 자신임을 명확히 드러낸다. 여기에서 작가는 마치 인류의 대표로 보이기도 하고 비닐봉투와 함께 온 지구를 다니며 지구의 위기적 상황을 경고하는 선지자의 모습으로 비치기도 한다. 예술가 자신의 초상과 지구온난화 문제에 대한 생태학적 작업을 결합함으로써 이 영상은 이미지의 낭만적 풍경과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한 공간의 순간적 왜곡 같은 편집의 묘미를 넘어 다른 차원의 문제를 상상하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생태 위기라는 문제적 상황 속에 등장한 작가의 존재는 예술이란 무엇이며 예술가의 역할은 어떤 것인가 하는 근본적 질문을 환기한다. 이경호 작가의 작업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를 결국 예술과 만나게 한다는 것인데, 비닐봉투가 거쳐간 곳은 대개 인간 문명의 긴 역사를 소환하는 장소들로 기후 위기는 곧 예술의 위기일 수도 있음을 경고한다. 현재도 침수가 반복되는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광장은 지구온난화로 가장 먼저 물에 잠길 대표적인 문화유산 중 하나이며, 지중해 지역의 여러 유적이 지구온난화로 인한 활발한 침식작용으로 훼손되고 있다는 최근 연구는 지구온난화와 예술이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지 보여준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예술의 종말은 그래픽 영상으로 제작된 작가의 최근작 <Deadline 1.5>(2021)에서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 리우데자네이루의 예수상, 모스크바의 성 바실리 성당, 피사의 사탑, 이집트의 스핑크스, 서울의 광화문 등이 물에 잠기는 모습으로 구현되면서 현실감 있게 전달된다. ‘데드라인 1.5도’는 2015년 체결한 파리기후변화협약에서 지구의 평균 온도 상승폭을 산업화 이전 대비 2도 이하로 억제하고, 가급적 1.5도를 넘지 않도록 각국이 노력하자고 한 약속을 의미한다. ‘봉다리 시리즈’에서 작가가 어떤 낙관적 미래나 무시무시한 전망도 담지 않았다면, 지구 평균 기온 1.5도 상승을 인류에게 부여된 마지노선으로 상정한 이 작품에서는 그 태도가 다급해졌다. 하지만 <Deadline 1.5>는 “그래도 인간은 기적처럼 이 상황을 극복해 나갈 것이다”라는 선언으로 끝을 맺는데, 이를 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인간의 선한 의지에 대한 순진한 믿음으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작가는 ‘기적’이라는 단어를 다른 작업에서도 자주 언급하는데, 이 역시 신의 은총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예수가 물고기 5마리와 떡 2개로 5,000명을 먹이신 성경 속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오병이어>(2017)에서 물고기와 떡 대신 붕어빵과 뻥튀기를 나누어주는 것은 신이 아닌 ‘사람’이며, 모세가 홍해를 가른 사건을 모티브로 한 <인간의 기적>(2017)은 기적의 주체가 누구여야 하는지 제목에서부터 명확히 드러낸다. 
  작가는 우리에게 기적을 만들 것을 촉구한다. 작가에게 기적은 미래에 대한 낙관이 아니라 당위에 가깝다. 절망이 답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기적에 가까울 만큼의 혁명적 행동을 촉구하는 것 말고는 이 위기를 돌파할 방법이 없다. 이경호의 작업은 환경 재앙을 보여주거나 단순히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 지구의 위기적 상황과 그에 대응하는 예술가의 미학적, 윤리적 역할에 대해 생각하게 하며 인간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음으로써 기적을 이야기한다.

 

봉다리의 새로운 여행 - 〈흑 백〉 연작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1. 프롤로그

작가 이경호는 그동안 퍼포먼스, 조각, 설치, 미디어아트 등 다양한 유형의 장르를 넘나들며 예술과 자본, 삶과 죽음, 생태적 주제와 관련한 은유와 비판적 풍자의 조형 언어로 발표해 왔다. 《2004광주비엔날레》에서 실제 뻥튀기 기계를 소재로 삼아 달, 거짓말, 가난이라는 키워드를 통해서 혁명 속에서 스러진 광주 시민들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던 작품, 〈달빛 소나타〉, 2010년 《광주민주화혁명 30주년 기념전》에서 10원짜리 동전을 광주 시민으로 은유했던 작품, 〈순환〉, 2014년 심장 수술 직전에 금으로 도금한 10원짜리 동전을 전시장에 설치했던 작품, 〈헛되고 헛되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리고 2014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다보스포럼’에서 언급했던 “통일은 대박이다”란 메시지에 대해 풍자적 비판으로 응수했던 작품인 〈Jackpot!〉 등은 대표적이다. 

이렇듯 그의 작업은 동시대의 사회적 요청에 화답하는 은유와 비판적 풍자의 작업으로 특징된다. 더불어 최근에는 지구 온난화와 같은 생태적 문제의식을 화두로 작업을 진척해 나가고 있다. 2009년부터 생태 사상가 토마스 베리(Thomas Berry, 1914-2009) 연구를 시작했고 연구 모임 ‘지구와사람’의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생태 문제와 지구법 그리고 동물법 등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면서 작업하고 있다. 

작가 이경호는 이번 전시에서 일명 ‘봉다리’ 연작 중 새롭게 시작한 작품 〈흑 백〉을 선보이는데, 이 작품에는 위에서 언급한 다양한 사회적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특히 그는 이번 전시에서, 전시 장소인 세종문화회관이 위치한 광화문 일대의 장소성에 주목한다. 촛불과 태극기가 가득 찼던 곳, 영광과 분노와 억울함이 한데 어우러진 곳, 지금도 제각기 다른 발언들로 넘쳐 나는 이곳에서 그는 신작 〈흑 백〉을 통해서 봉다리가 담아내는 다양한 사회적 문제의식을 구체화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천천히 살펴보자.  

 

2. 봉다리 

작가 이경호는 이번 전시에서 공간을 둘로 나누어 작품을 선보인다. 한 방에는 그동안 지금까지 발표했던 조각적 설치 및 퍼포먼스를 기록한 아카이브형 영상 작품과 더불어 애초부터 작품으로 기획되었던 영상 작품들을 여러 개의 모니터로 선보이는 것이고, 나머지 한 방에는 자신의 일명 ‘봉다리 시리즈’를 기록한 사진 작품을 배경으로 실제 여러 봉다리가 바람에 흩날리는 설치 작품을 대규모로 선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봉다리’라니? ‘봉(封)다리’는 사전에는 “경기, 전남 지역의 사투리”로 표기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경기, 전남뿐 아니라 경상도, 강원도는 물론이고, 일부이긴 하나 충청도에서 두루 사용되는 방언이다. ‘봉지(封紙, plastic bag)’가 표준어인데, 이것의 변용인 ‘봉대(封袋)’란 말에서 봉다리라는 말이 생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작가는 봉지라는 표준어를 놔두고 굳이 왜 봉다리라는 방언으로 자신의 작품을 지칭하는 것일까? 무엇보다 ‘경기 이남’을 두루 아우르는 방언인 만큼, 모두에게 친밀한 용어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도 이 땅에 여전히 남아 있는 지역주의와 연관된 이데올로기를 극복하는 용어로도 적합한 까닭이다. 그뿐만 아니다. 봉다리는 작가 이경호가 자신의 작품 속에 담고 싶은 최근의 주제 의식인 ‘놀이와 유희, 기억, 이데올로기, 환경과 생태’ 등의 개념을 한데 아우르기에 매우 유효한 매체이다. 자신의 창작을 위한 훌륭한 제재(題材)이자 매우 단순하고도 풍성한 질료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 봉다리가 어떤 관심으로부터 촉발되었고 이경호의 작품 속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전개되어 왔는지를,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구체적으로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3. 봉다리 비행 - 〈Somewhere〉 연작  

작가 이경호의 창작에 있어서, 봉다리는 다음과 같은 어린 시절의 경험을 소환한다. “초등학교 때 집에까지 오는 길에 돌이나 나뭇가지, 봉다리 등 버려진 것들을 집까지 발로 차서 가지고 왔었다. 오는 도중에 개울이나 수챗구멍에 빠져서 아쉽게 이별을 한 것들도 있었지만 우리 집 마루 밑엔 무언가 늘 수북이 쌓여 있었고 그 인연들을 보면서 그냥 뿌듯해했다.” 버려진 것들을 발로 차며 집에까지 가져오던 ‘소년기의 목적지 있는 놀이’는 한편으로 수집 놀이이자, 어떤 면에서 운동이었고 때론 노동이기도 했다. 이 봉다리는 그가 훗날 청년이 되어 프랑스의 미술학교에 재학하던 중 방학 때마다 떠났던 유럽 무전여행 중에 일련의 ‘창작을 위한 실험’으로 소환되기에 이른다. ‘소년기의 놀이와 운동’이 ‘청년기의 유희적 창작 수련’으로 소환된 셈이다.    

이러한 놀이로부터 창작 실험으로 이동한 변환의 지점에 흥미로운 에피소드 하나가 자리한다. 파리의 다락방에 거주하던 1988년 20대의 유학 시절, 가위에 눌렸던 악몽을 여러 번 경험했던 이경호는 그것을 극복하는 ‘척사(斥邪)’나 ‘액(厄)막이’의 방식으로 슈퍼마켓 ‘모노프리(Monoprix)’산(産) 비닐봉지에 눈 두 개를 그려 넣어 한동안 다락방 창문에 걸어 두었다. 기다란 손잡이를 가진 모양에 부릅뜬 두 개의 눈, 이러한 형상을 한 채 바람에 날리고 있는 비닐봉지! 그것은 부적(符籍)의 용도로서 족했을 것이다. 

작가 이경호는 2006년부터 본격적으로 이 봉다리를 자신의 창작으로 끌어들인다. 〈Somewhere〉라는 이름의 시리즈가 그것이다. 이 연작은 그가 유럽 여행 중 현지 상점에서 산 물건을 임시로 담았던 비닐봉지가 바람에 날리는 모습을 각 여행지의 풍경을 배경으로 카메라에 담은 것이다. 또는 바닷물 속에 빠져 있거나 누군가에 의해서 우연히 날리는 모습을 순간적으로 포착한 사진도 있다. 이러한 유럽 여행 당시 시작된 작업은 국내 및 아시아, 미국 등 다양한 국가에서의 해외여행으로 이어지면서 차츰 체계적인 양상으로 변모되어 간다.  

그러한 양상 중 하나는 비닐봉지의 색의 분별에 관한 것이었다. 대개는 검은색이었다. 경주(2006~19)뿐 아니라, 중국 홍콩(2006)과 북경(2009), 미국 마이애미(2010), 일본 나오시마(2011), 중국 시안(2018), 이탈리아 베니스(2018),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2019)가 그랬다. 다른 색도 사용되었다. 노란색은 북경의 만리장성에서 사용되었고, 흰색은 천안문 광장, 북경 천국의 사원(2009), 이탈리아 피사(2017)에서, 빨간색은 중국의 특별행정구 마카오 카지노와 홍콩(2006)에서 검은색과 함께 사용되었고, 파란색은 러시아 하싼의 북한 접경 지역(2009)과 프랑스 베르사유(2019)에서 그리고 물에 녹는 연두색(Green) 봉다리는 모나코 카지노에서 사용되었다. 이렇듯 그는 일정 부분 같은 장소에서는 같은 색의 비닐봉지를 사용해서 평생 이어질 이러한 프로젝트에 일관적인 의미를 부여하고자 노력해 오고 있다. 최근에는 이것을 ‘석유 덩어리’로 상징화하는 까닭으로 주로 검은색 봉다리를 작업에 사용하고 있다. 

이 시리즈에서 또 하나의 변모되어 가는 양상은 해외의 여행지 풍경을 바탕으로 주인공처럼 날고 있는 비닐봉지를 단순히 컷 이미지로 담았던 사진 작업에 부가하여 ‘드론(drone)’을 활용해서 촬영한 동영상을 추가, 병행함으로써 봉다리의 여행을 극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테크놀로지의 점진적인 발전의 시기를 거치면서 가능해진 것인데, 이 〈Somewhere〉 시리즈가 앞으로 새로운 테크놀로지와 만나 어떠한 모습으로 변주될 것인지 충분히 기대해 볼 만하다. 

‘봉다리의 비행’을 추적하는 이경호의 〈Somewhere〉 시리즈는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Edward Wilson)의 저서 『지구의 정복자(The Social Conquest of Earth)』의 표지로 사용된 바 있는 인상파 화가 고갱(Paul Gauguin)의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D'où venons-nous ? Qui sommes-nous ? Où allons-nous ?)〉(1897)라는 작품의 제목이 상기시키는 주제 의식을 탐구한다. 봉다리를 통한 ‘소년기의 놀이와 운동’이 ‘청년기의 유희적 창작 수련’을 거쳐서 이제는 ‘봉다리의 자유로운 비행’을 추적하고 ‘여행지의 기억을 소환’하면서 ‘봉다리’를 생로병사의 ‘인간 존재’에 대한 메타포로 삼는 것뿐만 아니라,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생태학의 관심사’로 견인하며 인간 존재에 관한 끊임없는 성찰을 도모하기에 이른 것이다. 

 

4. 봉다리 여행 - 〈Traveler〉 연작과 새로운 작업 〈흑 백〉

해외 각지에서 ‘봉다리의 자유로운 비행’을 추적하던 〈Somewhere〉 시리즈는 화이트큐브에 들어와 ‘봉다리의 구속된 비행’을 관찰하는 새로운 시리즈인 〈Traveler〉 연작을 낳기에 이른다. 이 연작은 복수의 봉다리를 화이트큐브에 직접 가져와 흩뿌려놓고 선풍기를 통한 인공 바람으로 비행을 강제하는 동시에 CCTV 카메라로 그것을 추적하면서 달과 같은 영상으로 변환하는 일종의 ‘인터랙티브 설치, 퍼포먼스, 영상이 뒤섞이는 미디어아트 작업’이다. 

2006년 갤러리 세줄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이 작품은 선풍기 바람에 날리는 ‘봉다리’가 CCTV카메라와 프로젝터 사이에 포착될 때마다 피드백 효과로 달의 영상 속에서 율동하듯이 회전 운동을 선보이면서 그 모습을 변형하고 변주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봉다리는 화이트큐브의 구속된 여행 속에서, 비록 협소한 개념이지만, 영토의 경계를 넘나드는 탈영토화를 수시로 경험한다. 보이지 않는 경계를 수시로 넘나들기! 2006년 《상하이비엔날레》와 《상하이아트페어》, 《퀼른아트페어》에서 다른 버전으로 선보인 이 작품은 올해 세종문화회관 전시에서는 인터랙티브 영상을 제외한 새로운 유형의 작업으로 소개된다. 

〈흑 백〉 이란 제명의 이번 작품은, 기존의 봉다리 연작 사진들이 벽면에 전시된 전시장 전체를 수십 개의 검은 봉다리와 흰 봉다리가 유영하듯이 돌아다니는 작품이다. 기존의 〈Traveler〉 연작을 구성하는 여러 조형 문법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문법만을 전시함으로써 이 시리즈물을 새롭게 재정의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흥미롭게도 이 작품의 제목은, 흑과 백이란 단어 사이에 쉼표(,)나 가운뎃점(ㆍ) 또는 빗금(/)과 같은 문장 부호 자체를 없앰으로써 “양자가 구분이 없거나 서로 다르지 않다”는 메시지를 의도적으로 드러낸다. 흑과 백은 그레마스(Greimas)의 언어 기호학에서 언급되듯이 ‘대조적 관계(une relation de contrariété)’에 놓인 반대어이다. 그런데 아무리 그 사이에 문장 부호를 없앴다고 하더라도 구분이 되지 않거나 다르지 않다고? 작품 제명을 통해서 드러내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는 무엇인가? 작가의 발언을 들어보자. 

 

“이번에는 흑색과 백색의 봉다리로 요즘 우리나라의 정치 상황, 남과 북, 동서(영호남), 좌우 대립의 색깔론 등을 풍자하는 설치로 흑묘, 백묘가 전부인 것이 아니라 경제 성장만 생각하고 앞만 보고 달려온 절름발이 나라에서 이제 화합해서 바로 걸을 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한 꿈을 꿔 보기를 제안합니다. 사람이 먼저인 나라, 문화가 있는 나라, 그래서 동물도 자연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환경이 되길 기대합니다.” 

 

위의 작가 진술에서 우리는 “남과 북, 동서(영호남), 좌우 대립의 색깔론을 풍자하는 설치”라는 대목을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흑과 백은 분명히 대조적 관계 속 반대어이지만, ‘흑 백’이라고 문장 부호 없이 표현한 제목에서처럼, 전시는 “대립의 색깔론을 풍자”하기 위해서 대립의 선명함을 무너뜨린다. 검은 봉다리와 흰 봉다리가 섞여 무작위로 인공 바람에 의해 날아다니는 풍경은 과연 어떠할까? 보기에 따라 그것은 마치 신인상주의 점묘법의 ‘시각적 혼합, 병치 혼합’처럼, 실제로는 회색이 아니지만, 마치 회색의 봉다리를 보는 것 같은 착시에 빠지는 효과를 창출한다. 

앞서 살펴본 그레마스의 기호학에서 흑백의 ‘대조적 관계’는 서로의 관점에서 검정/검정 아님(S1/non-S1)’, 하양/하양 아님(S2/non-S2)’ 식으로 ‘자기반성적’으로 성찰하는 모순적 관계(une relation de contradiction)를 통해서 변형된다는 사실을 유념하자. 이경호의 새로운 작업 〈흑 백〉은 검은 봉다리와 흰 봉다리가 끊임없는 혼성의 움직임을 통해 회색의 효과를 창출하게 된다. 즉 그레마스의 기호학으로 말해서, 흑과 백이 ‘검정/하양 아님(S1/non-S2)’의 만남이나 ‘하양/검정 아님(S2/non-S1)’의 만남을 지속함으로써 양자 간 회색의 효과를 누리게 되는 ‘상보적 관계(une relation de complémentarité)’를 형성하게 된 셈이라 할 것이다.

이렇듯 적대를 이루는 흑과 백의 ‘대립적 관계’를 화해시키고 소통을 도모하는 일은 이론적으로 간단하다. 양자가 자기반성을 통해서 서로 일보 양보하고 자신을 내어 줌으로써 둘 사이의 공통적 요소인 회색으로 접점을 찾으면 되는 일이다. 그러나 이론과 실제는 늘 다른 법. 현실계에서의 실천이란 쉽지 않다. 그렇다면 관객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부터 화합을 주선하는 이경호의 새로운 작품을 작가의 의도대로 읽어줄까? 이 또한 쉽지 않다. 

흥미로운 것은, 지금까지의 전시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다수의 관객은 ‘화이트큐브에서의 강제되고 구속된 비행’이나 ‘좌우 이데올로기의 화합’이라는 작가 이경호의 의도를 머리로 이해를 할 테지만, 가슴으로는 ‘봉다리의 자유로운 비행’으로 이 작품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소지가 다분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그러한 관객의 감상평을 현장에서 자주 들은 바 있다. 실내의 공간을 천천히 유영하듯이 날아다니는 봉다리의 ‘비정형화된 비행’에 많은 관객이 감정이입하고 공감하면서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자신의 정형화된 일상을 탈주하고픈 욕구를 느끼는 까닭일 것이다. 

 

5. 봉다리 생태 운동 - 탈(脫)양비론과 생명주의 

작가 이경호의 봉다리는 작품 〈Somewhere〉에서 ‘자유로운 비행 속 특정 공간을 탈주’하고,  〈Traveler〉에서 ‘구속된 여행 속 영토를 탈주’하며, 이제는 작품 〈흑 백〉에서 ‘이데올로기’를 탈주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봉다리의 탈주 운동은 정형화된 규범과 제도를 벗어나는 비정형화의 운동이다. 그것은 이것과 저것 사이의 정할 수 없는 운동이다. 흑과 백 중 어느 편에 머물지 않고 그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는 유연한 운동이다. 

그렇다면 이경호의 봉다리가 선보이는 것은 극단의 ‘흑백논리’를 탈주하는 멋진 운동이 아닌가? 그럴 수 있다. 봉다리 자체가 이러한 정해진 흑백논리를 탈주하는 정체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봉다리가 예전의 ‘보따리’와 같은 역할을 고스란히 계승하고 있다는 점은 대표적 예라 할 것이다. ‘보따리’는 종종 서구의 ‘포장과 이동 수단’인 박스(Box)와 비견되는데, 박스가 ‘정해진 용량의 그릇’의 의미를 지닌다면, 보따리는 ‘용량에 맞추는 그릇’이라는 점에서 그 정체성을 달리한다. 짐이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자신의 몸집을 달리 하는 보따리는 봉다리와 얼추 닮아 있다. 봉다리 또한 담는 물건의 모양에 맞추어 포장의 외형을 변형하거나 입구를 봉해서 포장의 크기를 줄이거나 늘일 수 있다는 점에서 박스의 ‘경직된 포장 용기’의 정체성을 탈주하는 ‘유연한 무엇’이 된다. 그렇다. 손바닥 크기로 접혀 몸집을 줄인 채로 있다가도 물건의 크기에 따라 이내 몸집을 키워 올리는 ‘뼈 없는 비닐 근육’으로 변주를 거듭하는 유연한 무엇이다. 그것은 담아왔던 물건을 비우고 난 얇은 껍질로 남아 버려지는 임시적 존재로서 마치 ‘허무한 우리네 인생’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자유롭다. 바람에 몸을 맡겨 자유로운 비행에 나서기도 하지 않는가? 그렇다. 봉다리는 ‘포장을 위한 유연한 그릇이자, 이동의 편의를 위한 임시 가방’이다. 그것은 ‘봉다리’로부터 찾을 수 있는 유연한 정체성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봉다리는 어찌 보면 그것은 흑도 백도 모두 틀린다고 양자를 부정하고 비판하면서 유연한 정체성이라는 이유로, 회색 지대에 머무르는 양비론(兩非論)이 아니던가? 정말 그런가? 이경호는 이 양비론에 있지 않다. 굳이 언급하면 좌우의 대립 중 좌측에 있는 편이며, 다수와 소수의 대립 중 소수에 있는 편이며, 환경과 문명의 대립 중 환경에 있는 편이며 그 환경 중에서도 ‘생태 지향의 인간 환경’에 있으려는 입장이라고 하겠다. 

여기에 매우 주요한 질문이 있다. 그렇다면 작가 이경호는 환경오염의 주범이자, 수거되고 버려져야 마땅할 쓰레기인 이 봉다리를 왜 ‘생태 지향의 인간 환경’의 입장에서 폐기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작품 안으로 가져오는 것일까? 이 봉다리, 즉 비닐봉지(plastic bag)는 그야말로 플라스틱 쓰레기가 아니던가? 그는 말한다: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은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더 무섭게 만들어 직시하는 것이다. 내 작업이 그런 역할을 했으면 한다.” 그렇다. 그의 청년기였던 파리 유학 시절, 악몽을 퇴치하고자, 부릅뜬 두 눈을 그려 척사의 용도로 비닐봉지를 사용했던 것처럼, 작가 이경호는 환경오염과 파괴의 상황에서 그것과 관련한 메시지를 ‘더 무섭게 만들어 직시’하고자 환경 파괴의 주범이라고 평가받는 봉다리를 ‘생태 운동’의 주요한 모델로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역설이지만 새로운 개념을 낳는다. 

봉다리 생태 운동? 오랫동안 ‘구속 없는 자유로운 비행’으로 봉다리를 탐구했던 이경호는 2000년대에 이르러 이 봉다리를 지구 온난화의 주범인 화석 연료, 그의 표현대로 ‘석유 덩어리’로 보기 시작하면서 기존의 봉다리 연작 속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에 이른다. 기존의  야외에서 펼쳤던 〈Somewhere〉 연작에서부터, 실내 공간에 들어온 〈Traveler〉 연작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다루는 새로운 작품 〈흑 백〉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생태의 문제의식은 곳곳에 스미어있다. 또한 그는 봉다리 연작 외에도 이러한 생태 지향의 다양한 프로젝트를 이미 진행했고 또 새롭게 기획하고 있다. 특히 작가 이경호에게 있어서, 결혼 후 아들 찬유를 낳고 책임감 있는 아버지가 된 경험, 생사를 오가던 심장 수술을 받았던 경험은 생명의 소중함과 인류의 책임을 강렬하게 인식하게 만드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는 현재 전기차로 자신의 자동차를 바꾸면서 ‘최소한 나로부터의 출발’을 다짐하면서 이러한 생태 운동의 선두에 선 미술가로 자리하게 된다. 아들에게 물려 줄 미래의 환경은 어떠해야만 할까? 이러한 질문을 화두로 삼은 것이다. 

지구 온난화를 촉발하는 화석 연료, 그것의 상징인 봉다리! 그것은, ‘이곳, 저곳에 머물지 않는 자유로운 비행’과 ‘유연한 정체성’으로 인해 감내해야만 했던 양비론이라는 비판으로부터 이제 결연하게 탈주한다. 작가 이경호가 이 봉다리를 미술 생태 운동을 이끄는 한 주역으로 재무장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

 

제 2의 막이 오르다_이경호 개인전 “Traveler"

이경호 개인전  20060407-20060528 갤러리 세줄

앨리스온 2006년 6월

 

최근 전시를 기획하거나 감상하면서, 필자는 문득 개인전의 의미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된다. 전시장에서 전시된 작품들이 미술사나 관련된 이론들과 엮여 해석되는 것도 개인전에서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만, 필자는 개인전을 대할 때 “아우개가 개인전을 연다.”라는 가장 객관적인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인전에는 그간에 제작된 작품과 동일한 시간 동안 현실 속에서 정제되고 날카로워진 작가적 감성이 함께 농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행자’라는 타이틀로 열리는 이경호의 두 번째 개인전은 작가 이경호가 4년 만에 준비한 전시로서, 그 동안 꾸준히 바라보아 온 세계에 대한 그의 시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의 전시를 단순히 영상매체를 이용한 퍼포먼스나 그것의 결과물이 아닌, 그의 습관, 태도, 감각이 녹아있는 한편의 서사극으로 봐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막 4장의 세상이야기

작가 이경호가 들려주는 인생이야기의 그 두 번째 막은, 그가 바라보는 네 가지의 세상이야기로 시작된다. <버려진 시간들>, <백남준 선생님을 기리며…>,<풍경>,<여행자>라는 제목의 작품들은 조각이나 회화처럼 정해진 공간의 범위 내에서 정지되어 있지 않고, 갖가지 음향과 소음, 빛과 영상의 형태가 한 데 어우러져 하나의 연출된 공간이라는 느낌을 준다. 각각의 작품들에서는 그가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입장들이 갖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다양한 변주들이 보는 이로 하여금 작가의 시선에 동참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먼저, <버려진 시간들>은 실제로 2년 동안 길가에 방치된 채 버려져 있던 포장마차를 이용한 작품이다. 작가가 실제로 바람에 따라 움직이는 구름처럼 여행을 좋아한다는 주변인들의 말과 같이, 그의 작품에는 여행 중에 발견하거나 운 좋게 얻은, 혹은 구입한 사물, 오브제들이 작품에 선택되어 등장한다. 보이지 않은 작가적 감각의 더듬이를 치켜세우고, 그가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을 달을 수 있는 훌륭한 오브제들인 것이다. 어두 컴컴한 전시장을 들어서면, 헝클어진 머리처럼, 때론 예수의 가시면류관처럼 마른 나뭇가지가 덤불처럼 포장마차의 윗부분을 감싸고 있고, 내부의 곳곳에 작은 모니터가 설치되어 이쓴 거대한 설치물을 발견하게 된다. 모니터에는 포장마차 자체에 얽힌 지나간 과거에 대한 이야기뿐 아니라, 버려진 포장마차의 외관에서 작가가 연상한 다양한 이미지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한데 어우러져 있다. 거리의 악사가 색소폰을 연주하거나, 주홍색 비닐 wkdar 위로 취객들이 잔을 주고받는 그림자가 비치는 장면 등 버려진 포장마차를 추억하는 풍경을 담은 영상들이 미추고, 고통 받는 예수의 모습을 연상시키려는 듯 소음이 섞인 기독교 방송이 흘러나온다. 한편으로 엉켜있는 나뭇가지 사이로는 버려진 포장마차처럼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을 훔쳐보는 시선으로 담아낸 영상이 투사된다. 마치 작가와 같은 위치에서 작가와 함께 나뭇가지 사이로 인물들을 응시하는 와중에, 바라보고 있던 인물과 눈이 마주치게 되면, 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하게 되는 일도 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대로~’의 노랫말을 담고 있는 가수 전인권의 ‘걱정 말아요, 그대’와, 찬송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의 노랫소리를 배경으로, 포장마차 곳곳에 숨겨져서 과거를 추억하는 영상과 버려진 포장마차의 신세처럼 버림받은 이들을 훔쳐보는 시각은 그가 바라보는 세상이야기의 제 1장을 연다.

 

세상이야기의 두 번째는 그의 개인전이 열리기 전 타계한 고 백남준 선생에 대한 추모 작품이다. <백남준 선생님을 기리며…>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파리 여행 때, 지인의 소개로 백남준 선생을 만난 인연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동대문 벼룩시장에서 구입한 바이올린이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러닝 머신에 묶인 채 계속해서 끌려가는 모습을 담은 이 작업은, 타계한 선배 작가의 행보에 대한 추모를 넘어, 앞으로 자신의 현실과 내면과 싸우며, 힘차게 걸어 나가야 할 작가 자신의 삶의 행보를 담은 듯하다.

 

이경호가 이야기하는 세상 이야기의 그 세 번째 장은 사회의 권력 구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전쟁처럼 하루하루를 사는 인간의 모습을 냉소적으로 바라본 작품 <풍경> 으로 시작된다. 일단 전시장을 들어서면 갖가지의 기계 소리와 시시각각 변하는 영상 이미지들로 정신이 혼미해진다. 동네 시장과 거리의 건널목, 횡단보도의 노점들을 지나다가 구입한 장난감 불도저와 포크레인, 자동차 경주용 모형들이 전시장에 즐비해 있다. 작품에는 센서가 부착되어 있어 관람객에 다가가가면 다양한 종류의 장난감들은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수 십 개의 포크레인과 불도저가 일렬로 줄지어서 일제히 정해진 위치에서 땅을 파고, 흙을 나르는 동작을 반복하고, 한 쪽에서는 붉은 색 비상등이 돌아가는 급박한 분위기 속에, 소형 자동차가 경주용 모형 레일을 따라 정신없이 움직인다. 간혹 몇몇의 포크레인이 냉면 그릇에 쌀이 가득 담긴 그릇을 쉴 대 없이 퍼내어, 간간한 재미를 더하지만, 순간의 재미는 먹고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우리네 일상을 대변하는 것 같아 씁쓸함을 남긴다. 이처럼 혼란스러운 바닥의 풍경들은 실시간 카메라로 촬영되어 비디오 영사기를 통해 벽면에 투사되는데, 그것은 꼭 감시자의 의해 곳곳에 CCTV로 실시간 녹화되는 하면들을 연출하여 더욱 긴박하고, 결코 자유롭게 빠져 나올 수 있는 일련의 여지도 주지 않는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더욱이 공사장에서 핑나는 열기를 표현하기 위해 설치한 가습기에서 피어나는 수증기는 비디오 영사기의 빛에 투과되어 전체적으로 다이나믹한 분위기를 더한다. 한편 포크레인이 퍼내고 있는 쌀이 가득 담긴 냉면그릇과는 대조적으로 전시장 구석에 빈 밥그릇을 배치하여, 관람객이 밥그릇을 뻥뻥 차면서 조금이나마 억압되어 있는 사회현실 속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해소햅라는 작가의 배려는 그가 만들어낸 풍경을 미소 띤 채 바라보며 유유히 공중을 날고 있는 아톰인형과 함께 그이 작가적 유머를 느끼게 해주는 작은 장치가 되고 있다.

 

그가 전하는 4년간의 세상이야기는 <여행자>라는 작품으로 마무리 되는 듯하다. 지나가 버린 시간들을 추억하는 일이나, 각박한 현실에 대한 씁쓸함을 전하는 이전의 작품들과는 또 다른 작가의 감수성을 엿보게 하는 작업이다. 밤하늘의 달빛의 형상을 마치 흙으로 주물러 반죽하듯이, 카메라와 비디오 영상기의 실시간 촬영과 투사로 조각해낸다. 빛의 양에 따라 영상의 반응하는 메커니즘은, 보는 이로 하여금 달의 형상이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느껴지도록 한다. 마치 외부의 균들이 들어오면 그것을 배척해내기 위해 싸우는 세포들의 움직임처럼 말이다. 바닥에 흩어져 있는 검은색 비닐봉지가 선풍기 바람에 날려 공기를 품고 공중에 떠올라 우연히 달의 형상과 만나게 되면, 봉지의 그림자로 인해 빛의 양의 조절되어, 달의 형상이 일그러진다. 그 형상도 검은 비닐봉지의 형태와 많이 닮아 있어서, 십여개의 봉지들이 바람에 흩날리는 형태가 꼭 달의 형태가 변화할 때 나타나는 무늬들의 모습을 빼 닮았다. 밝은 빛으로 가득한 달의 형태는 이미지들의 연쇄, 반복, 순환적인 움직임에 따라 리듬을 타고, 하나의 서정적인 곡을 연주하면서 지난 4년간 펼쳐진 그의 역동적인 삶의 행보를 위로하는 듯 느껴지는 작품이다.

 

90년대 한국현대미술의 탈장르적 현상과 함께, 퍼포먼스는 작가들에 의해 빈번하게 시연되고 있는 예술의 한 장르이다. 더군다나 카메라와 비디오 영사기가 퍼포먼스에 적극 도입되면서, 현재에는 좀 더 다이나믹하고 극적인 상황의 연출이 가능해진 것이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비디어를 활용한 다양한 장르의 예술 작품들을 대할 때 문득 드는 생각은, 매체의 속성으로 인해 작품의 내용이 왜곡되거나, 접근되지 못한 채 남겨져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작품의 내용이 그 형식과 어우러지지 못하면서 서로가 겉도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이경호의 이번 전시는 작품 전체적인 분위기 연출에 있어서 매체이 감각적이고 적절한 활용이, 작가 자신의 정체성이 묻어나는 필터링을 걸쳐, 작가의 선택과 결정에 의해 선정, 배열된 오브제, 그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삶의 이야기들과 함께 서로 융화되어 전달되고 있다는 것에 다시 한 번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200606 앨리스온 이경호展 리뷰

우리가 꿈꾸는 잭팟은 무엇일까? 

LeeShine You Art

사랑, 돈, 권력, 저 마다 기준은 다르지만 우리는 모두 ‘잭팟’을 꿈꾼다. 명문대에 진학하는 것이 십대들의 잭팟 이라면 백마 탄 왕자님을 꿈꾸는 이십 대 아가씨의 잭팟은 동화같이 아름다운 사랑일 것이요, 갑갑한 현실에서 벗어 나고픈 직장인들에겐 1등 로또 당첨이 "잭팟" 일 것이다.

통일은 대박이라는 유명한 어록을 남겼던 박 전 대통령의 말에서 모티브를 얻은 미디어 아티스트, 이경호가 최근 아트 부산에서 ‘잭팟’ 이라는 타이틀로 특별전을 가졌다.

전시장 안에는 포크레인과 불도저, 십원 짜리 동전들이 잔뜩 놓여져 있었고 맞은 편 하얀 벽면에는 20세기의 굵직한 사건들과 함께 권력을 독식했던 역대 독재자들의 얼굴들이 현란한 음악과 조명 아래 영상으로 비춰지고 있었다.

뻥 튀기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오병이어, 빙하, Human Miracle (인간의 기적)과 같은 설치 미술로 연신 화제를 모으며 유쾌한 풍자를 이어가고 있는 이경호 작가.

그가 ‘잭팟’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는 과연 어떠한 것일까?

예술로 시대를 말하고 살아가는 삶으로 예술을 전하는 행동하는 예술가, 이경호에게 들어보았다.

Q 엄청난 양의 동전이 쏟아져 내리고 그것을 연거푸 포크레인이 담으려고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것이 풍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2006년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은 중국에 갔다가 여기저기서 포크레인으로 공사를 하는 것을 보며 천지개벽이라 표현했다. 포크레인은 권력의 상징이다. 자연을 훼손해서라도 눈 앞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앞세워 개발에 나서는 권력인들의 욕심, 탐욕을 풍자했다.

Q 역대 대통령과 후세인 레닌 히틀러와 같은 독재자들의 얼굴이 영상에 보인다. 그들과 잭팟을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을까?

이 영상안에는 20세기에 인간이 저질로 놓은 모든 만행들이 다 있다. 지하 땅 굴에 숨어있다 체포된 사담 후세인의 비참한 최후를 보면 수십 만명을 공포에 몰아 넣고도 죽기 직전까지 자기 항변만을 늘어놓았던 독재가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그가 꿈꾸었던 “잭팟”이 얼마나 허무맹랑하고 극악무도한 일 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Q 이 전시 말고도 이명박 전 대통령의 사대강을 풍자한 미치마우스 퍼포먼스를 했다고 들었다. 다음 작품은 어떤 것일 까 궁금하다. 현재 관심사는 무엇인가?

20대 때 나는 에너지가 넘치는 예술가였다. 나는 어디서 왔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라는 존재에 대한 고민들을 하다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면서 나의 관심사가 그 아이가 살 미래로 옮겨갔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아이가 살아야 하는 환경, 특별히 기후변화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무분별한 개발로 결정적인 피해를 입는 것은 결국 우리의 아이들이기에 환경문제를 불구경 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적극 참여할 때라고 생각한다. 물이 서서히 뜨거워 지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가 임계점에 도달하면 점프할 때를 놓치고 죽고 마는 냄비안의 개구리처럼 우리가 자연이 주는 경고를 무시한채 이것 또한 익숙해져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 재앙적 사고를 막기 위해선 인간의 혁명적인 사고의 변화가 필요하다. 그것을 앞으로의 작품을 통해 꾸준히 표현할 계획이다.

이경호 작가는 작품을 통해 인간 이면에 탐욕, 권력욕, 우상숭배 그것들이 어떻게 인간세계를 파괴해 왔는지 상기시킨다. 그토록 원하던 권력과 사랑, 부 이 모든 대박이 사실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 주기는 커녕, 우리의 인생을 오히려 파멸로 이끄는 놀부의 “썩은 박”은 아닐까?

잭팟, 이것만 있으면 행복할 거라고 믿는 가짜 행복

언젠가 터질 잭팟을 꿈꾸며 십 원의 값어치를 금으로 포장하려는 우리의 나약함.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겸손 해지며 겸손해질 때 비로소 표면이 아닌 이면에 허황된 꿈이 아닌 실재에 도달한다고 그는 말한다.

돈을 지배하는 지배층, 그들이 쌓은 부와 권력을 비판하며 한편으로는 그것을 부러워하는 인간의 이중 모습. 이와 같은 모순이 존재하는 것이 사람이며, 그 모순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인생이다.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사건들이 현실 곳곳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요즘, 재앙을 축복으로 돌이킬 수 있는 기지가 인간에게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작가는 오늘도 행동에 나선다.

바람에 펄럭이는 파란 천을 하늘에 매달며 또 하나의 기적을 만들길 원하는 작가의 순수한 마음이 사람들의 마음에 철썩이는 파도가 되어 번져 나가기를 기도하며 외쳐본다.

임계점 임박 Ready, Action !

플록코트를 입은 낭만주의자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비평) 

 

 

비닐봉지. 비닐봉지가 날아다닌다. 세계 도처를 날아다닌다. 정처 없이 날아다닌다. 그렇게 비닐봉지는 오지에도 가고 도시에도 간다. 평화로운 곳에도 가고 분쟁지역에도 간다. 그렇게 날아다니면서 비닐봉지는 가는 곳마다 뭔가를 흩뿌리는데, 씨앗이다. 생명의 씨앗이다. 이 작업에서 작가는 무슨 인격체마냥 비닐봉지의 시각에 포착된 세상을 보여주고 비닐봉지가 본 세계를 보여준다. 생명을 지키는 파수꾼이며 생명의 씨앗을 퍼트리는 전도사로 의인화된 비닐봉지를 보여준다. 보기에 따라서 정처 없이 날아다니는 비닐봉지가 정처 없는 삶의 알레고리 같고, 빈 봉지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의미의 공수래공수거를 변주한 것도 같다. 

또 다른 작업에서 비닐봉지가 실내로 들어왔다. 이번에는 비닐봉지가 아니라 비닐봉지들이다. 선풍기의 바람에 반응하면서 비닐봉지들이 코너에 몰려 있는 것도 같고 웅성거리는 것도 같다. 그렇게 뜻 모를 소리로 웅얼거리면서 이따금씩 꽤 높게 날아오르기도 하지만 코너를 벗어나지는 못한다. 그렇게 꽤 높게 날아오른 비닐봉지가 영상으로 재현된 둥근 달을 스치면서 달 표면에 패턴을 만들고 달그림자를 만들기도 한다. 여기까지는 작가가 부친 제목(달빛 소나타)마냥 꽤 낭만적으로 보이기조차 한다. 

그러나 굴삭기들이, 가습기가, 하이웨이와 자동차 모형이, 그리고 여기에 하늘을 나는 아톰과 같은 예기치 못한 불청객이 끼어들면서 낭만적인 풍경은 그로테스크한 정경으로 변질되고 소나타는 레퀴엠으로 전환된다. 실제로는 하나같은 모형들이지만 근접 촬영한 영상이 실물처럼 보이고, 저보다 큰 키로 벽면에서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낯설게 보인다. 그렇게 어떤 굴삭기는 연신 물을 퍼내고 다른 굴삭기는 뻥튀기(웬 뻥튀기?)를 퍼내지만 대부분의 굴삭기들은 그저 헛 삽질을 반복해 보여줄 뿐이다. 여기에 가습기가 뿜어내는 연무가 마치 건물굴뚝이 뿜어내는 오염물질 같다. 아마도 무분별한 개발과 경제드라이버를 풍자한 것일 터이다. 그리고 여기에 자동차 모형이 미친 것 같은 속도로 하이웨이를 내달린다. 그렇게 내달려봤자 한정된 틀 안을 무슨 다람쥐 채 바퀴 돌 듯 맴돌 뿐이다. 아마도 더 이상 브레이크가 작동하지 않는 고삐 풀린 속도경쟁을 풍자한 것일 터이다. 이 모든 을씨년스런 정경 위로 아톰이 붕붕거리면서 날아다닌다. 여기서 아톰은 미쳐 돌아가는 세상을 구원하러온 정의의 사잔지 아니면 미친 세상에서 파견된 감시잔지가 불분명하다. 

그렇게 작가는 저 홀로 선한 빈 봉지의 눈에 비친 무슨 세기말적 풍경 같은 세상풍경을 보여준다. 그 배경음으로 랩소디가 음울하게 깔리는 무슨 느와르 영화 속 한 장면(흔히 뒷골목에 비닐봉지가 굴러다니는) 같은 세상풍경을 예시해준다. 

 

십 원짜리 동전. 하늘에서 십 원짜리 동전이 비처럼 솟아져 내린다. 마치 황금비로 변신한 제우스신을 맞아들이는 디아나를 그린 구스타브 클림트의 그림 같다. 때로 십 원짜리 동전은 눈에 띠게 천천히 떨어져 내리면서 조명을 받아 반짝거리고 아롱거리는 것이 환상적이고 신비스럽다. 환상적이다? 신비스럽다? 바로 아우라다. 물신이다. 재화는 단순한 물질에 지나지 않지만, 여기에 정신적이고 영적인 가치를 부여한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재화를 꿈꾸고 대박을 꿈꾼다. 여기에 국내외 정치사의 단면들이 배경화면으로 흐르면서 오버랩 된다. 영상 속 선남선녀들이 재화를 약속하고 대박을 약속한다. 유토피아를 약속하고 지상낙원을 약속한다. 그러나 그 약속은 애초부터 지키지 못할 빈말임이 드러나고 허언임이 폭로된다. 유토피아는 처음부터 없었다(유토피아는 없는 장소, 부재하는 장소란 의미다).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은 것을 약속한다? 이로써 작가는 일장춘몽의 부질없음(꿈 깨!)을 주지시키고, 정치적 선동과 거짓말의 덧없음(거짓말 하지 마!)을 주지시킨다. 

 

뻥튀기. 이번에는 하늘에서 뻥튀기가 솟아져 내린다. 건물 뒤에 숨은 뻥튀기 기계로부터 무슨 총이라도 쏘듯 느리게 때로 빠르게 연신 뻥튀기를 하늘로 쏘아댄다. 그렇게 수북이 쌓인 뻥튀기를 사람들이 와서 먹는다.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게 해 사람들을 먹였다는, 빵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로 사람들을 먹였다는 성경의 오병이어에서 착안한 것이라고 한다. 먹고사는 문제, 식량문제, 정당한 분배와 관련한 정의의 실현문제를 주제화한 것일 터이다. 여기에 뻥튀기와 관련한 작가의 유년시절의 추억이 최초의 발상을 제공했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또 다른 작업에서 프라다의 수석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포장용기로 뻥튀기를 포장한다. 가장 값 싼 것을 가장 값 비싼 용기로 포장한다? 여기서 작가는 아이러니를 건드린다. 사람들은 프라다에 주목하지, 누구도 뻥튀기에는 관심조차 없다. 여기서 프라다는 실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저 프라다 포장지며 프라다 로고면 충분하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건 한갓 포장지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중요한 건 알맹이고 실재다. 알맹이가 있고서야 포장지가 의미가 있고, 실재가 있고서야 상징이 의미가 있는 법이다. 이로써 작가는 누구도 실재에 대해서 관심조차 없는 시대, 이미지를 좇고 겉보기만을 추구하는 시대를 풍자한다. 그리고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과연 무엇을 잃거나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새삼 되새기게 만든다. 

 

생각하기. 그리고 작가는 각각 밥그릇을 발로 차는 행위에 대하여, 허물어진 건물에 대하여,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것에 대하여, 그리고 환경문제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제안한다. 

밥그릇을 발로 찬다. 그리고 한 템포 쉬면서 엄숙한 자세로 생각한다. 다시 밥그릇을 발로 찬다. 그리고 잠시 호흡을 끊고 정중한 태도로 생각에 잠긴다. 다시 밥그릇을 발로 찬다. 그리고 다시 생각하기를 반복해 보여준다. 왜 작가는 죄 없는 밥그릇을 발로 차는가. 그리고 자기가 찬 밥그릇 앞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가. 작가의 이 작업은 역설적 표현으로 봐야 한다. 즉 밥그릇을 발로 차는 작가의 행위는 사실은 밥그릇을 발로 차서는 안 된다는 역설적 표현이다. 연탄을 발로 차지 마라는, 너는 저 연탄처럼 자기 몸을 불살라 다른 누군가의 몸을 따뜻하게 데워준 적이 있느냐고 연탄을 발로 차는 사람을 질책하는 안도현 시인의 시가 생각난다. 먹고사는 문제는 그저 존재를 연명하기 위한 일차원적 문제가 아니라,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존엄에 속한 문제라는, 어쩌면 너무나 당연해 까맣게 잊고 있었던 사실을 주지시킨다. 

그리고 얼마 전 멀쩡한 건물이 무슨 피사의 사탑처럼 한 쪽으로 기울어졌다는 뉴스보도가 있었다. 작가는 그 소식을 접하자마자 곧장 현장으로 달려가 현장을 기록으로 남겼다. 물론 지금 그 건물은 첨단의 해체공법으로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지고 없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실없이 반문해오는 것도 같고, 심지어 소음도 먼지도 없는 것이 무슨 게 눈 감추듯 뚝딱인 것도 같다. 현실과 초현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현실이 이미 초현실이고, 초현실이 진즉에 현실이었다. 황금시간대에 속하는 저녁뉴스가 온통 이런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이성과 비이성의 차이가 지워지는, 도대체 알 수 없는 일상으로 도배돼 있다시피 한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치부는 가급적 빨리 숨기고 가리고 지워지고 사라져야 한다. 작가는 그 치부에 대해서 생각해보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작가는 한 한적한 시골 버스 정류장을 영상으로 기록했다.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정류장에서 같은 버스를 기다리고 타고 내리기를 반복하는 같은 사람들(노부부?)의 모습을 기록으로 보여준다. 아마도 읍내에 있는 주민 센터나 노인정에 매일같이 출퇴근하는 것일 터이다. 일상은 다람쥐 채 바퀴 돌듯 똑같은 일의 연속이고 반복이다. 그러나 사실은 똑같지만 똑같지가 않다. 미학적 용어를 빌리자면 반복속의 차이, 그 속에 차이를 내포한 반복, 차이를 생성시키는 반복을 살고 실천하는 일의 소중함을 주지시킨다. 누군지도 모르는, 그리고 굳이 몰라도 상관이 없는 익명적 주체들의 평범한 일상을 사는 일이 어떤 경건함(무슨 밀레의 만종이나 이삭줍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에서와 같은)마저 자아낸다. 

그리고 작가는 일련의 설치미술을 통해 환경오염으로 빙하가 녹아내리는 것에 대하여,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 새 시대(아마도 환경이 확 달라진 시대)가 열리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보자고 제안한다. 환경을 주제화한 한편, 그 주제를 실제 환경 속에 풀어놓는다는 점에서 일종의 대지예술로 볼 수가 있겠다. 

 

주로 영상이지만, 작업 속에서 작가 이경호의 모습은 한결 같다. 목을 덮어서 가린 긴 뒷머리와 깃을 세워 입은 플록코트가 시대착오적인 수도승 같은 인상을 준다. 나만 그런가. 여하튼. 짐짓 진지하고 경건함마저 자아내는, 시대에 대한 입장과 예술을 대하는 태도가 낭만적(혹은 낭만주의적) 예술가상을 떠올리게 만든다(리얼리스트가 아니고?). 이를테면 작가의 작업은 비닐봉지와 십 원짜리 동전, 뻥튀기와 밥그릇 같은 하찮은 것들, 별 볼일 없는 것들, 소외된 것들을 소환한다. 그리고 먹고사는 문제, 일상을 사는 문제, 그리고 환경과 같은 평범한 문제를 고민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문제들의 배경에는 언제나 이런 소외된 것들이 있음을 주지시킨다. 그 모든 삶의 현장에는 어김없이 작가가 있다. 밥그릇을 발로 찰 때(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될 때?)도, 건물이 붕괴될 때(시대가, 사회가 허물어질 때?)도, 일상이 중계되고 환경이 재앙에 처했을 때도 그곳에는 어김없이 작가가 있었다. 스스로를 현장의 증언자이며 시대의 목격자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작가는 파격과 실험, 역설과 유희가 넘치는 미디어, 설치 등의 다양한 작업을 통해 동시대 문명의 아이러니와 개인적 일상이 엇갈리게 접합되어 있는 현대의 모순적인 양상에 대해 꾸준히 탐구해 왔다. 그의 작업은 외면의 시각적인 기발함과 엉뚱함 못지않게 그 속내는 우리의 삶과 존재에 대한 지극히 일상적이고 감성적인 성찰을 담고 있어 종종 기대치 않은 잔잔한 울림을 던져준다. 서로 다른 이질적인 것들이 복잡하게 혼융되어 있는 이 시대의 다양한 이슈들에 대해 작가 특유의 천진하고 순수한, 혹은 진정성 있는 시선이 그 기저에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미 없음의 잡동사니 같은 세상세태가 유의미성을 부여하는 작가적 사유에 의해 보완되는 식이다. 흔하지만 때로는 그 의미조차 미처 잊고 있었던 십 원짜리 동전이 가느다란 실에 설치되어 있는 <Meaningless! Meanignless! Meaningless!>작업의 경우, 그 위태하게 매달려 있는 유동적인 돈의 존재론을 새삼스럽게 관조하게 만드는가 하면, <Jackpot> 시리즈의 경우 세속적인 대박의 의미를 기존 정치권의 경박한 작태, 굴곡진 근현대사의 풍경들과 연결시켜 비판적 성찰과 유머러스함을 동시에 드러낸다. 이 밖에도 <BABEL BABEL BABEL>, <Thingking about......>, <Manna> 등의 영상 작업을 통해 세상살이라는 긴 여행 속에서 우연하게 만나는 모순적인 것들마저 끌어안아, 그 이면의 비가시적인 것들이 가지고 있는 낯설지만 살가움으로 살아있는 정서들을 드러낸다.

- 한국미술신문 현인정기자 보도글 중에서 -Leekyungho 2014

 

카탈로그 서문 (이원일의 창조적 역설전, 2014. 2. 21~3. 6, 쿤스트독)

 

 

이경호의 '창조적 역설

 

책임기획 : 김성호(미술평론가)

 

 

이경호는 이번 전시에서 영상과 설치 작업을 통해 '창조적 역설'을 재해석한다.

작품 <Jackpot !>은 제명이 상기하듯이, '대박(Jackpot)'이란 단어가 던지는 역설적 의미를 탐구한다. 이경호는 2013년 박근혜 대통령의 스위스 다보스포럼 연설 중 "통일은 대박"이라는 발언과 더불어 자신의 아들과의 대화에서 사용된 '대박'이란 발언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작업을 시작했다고 증언한다. 즉 '대박'이라는 같은 단어의 다른 쓰임새에 주목한 작가는 '조소(嘲笑)적 문제제기'와 '비판적 성찰'의 양단에 선 자신의 작업을 통해서 현대인에게 진정한 대박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작품은 돈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영상 작업과 돈의 실재를 드러낸 설치 작업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상 작업은 돈이 무더기로 떨어지는 장면을 고속카메라로 근접 촬영하여 슬로우 영상으로 틀어주는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장엄한 한 동영상으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전시장에서 가장 높은 천장을 지니고 있는 벽면에 투사되어 비장하고도 장엄한 숭고미를 드러낸다. 천천히 떨어지는 클로즈업된 동전들의 낙하를 더욱 숭고한 무엇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다름 아닌 음악들이다. 동전들은 카에타누 벨로주(Caetano Velose)의 감미롭고도 애잔한 노래와 더불어 빌리 할리데이(Billie Holiday)의 처연한 노래와 애절한 재즈 선율에 실려 춤을 추듯이 천천히 낙하한다. 인간의 만남과 사랑에 관한 노래 가사들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낙하하는 돈이란 인간 욕망에 대한 또 다른 메타포이다. 그것은 늘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우리의 '사랑하기'와 닮아있다. 사랑하는 사람 없이 인간이 살아가기 힘들듯이, 돈 없이 인간은 살기 힘들다. 양자 모두는 우리에게 필요한 존재이다. 이렇듯 '돈, 욕망, 사랑'이 겹쳐진 그의 영상에는 인간의 금전을 향한 욕망 뒤에 추락하는 인간상마저 오버랩되어 있다. 그것은 애처롭거나 처연한 것이자, 삶의 끝자락에서 부둥켜 잡는 가느라단 끈처럼 위태롭기조차 하다. 영상은 후반부에 이르러 캐넌 앤더슨(Canan Anderson)의 전자 바이올린 연주곡에 따라 빠른 속도로 전개되기 시작된다. 끝없이 추락하기만 하던 동전들의 무리는 이경호가 만들어낸 컴퓨터 그래픽의 옷을 입고, 원형 군무를 추면서 '돈'의 공연을 펼친다. 그것은 매우 흥겨운 공연이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우리를 슬프게 하는 스펙터클이다. 그 공연 한 가운데에 세계 근현대사의 처절했던 사건들을 담은 영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기 때문이다. '동전'에 자신의 모습을 각인시켰던 각 나라의 왕, 여왕, 독재자들의 모습은 물론이고, 정치가, 예술가들의 모습이 겹쳐지고 흩뿌려지면서 영욕 속에 생멸했던 근현대 제국의 역사가 우리의 눈앞을 스쳐지나간다. 거기에는 1, 2차 세계대전, 캄보디아 내전, 광주의 민주화운동, 아랍 혁명, 20/21세기 테러 등의 참담한 역사의 내러티브가 있다. 그 뿐인가? 거기에는 관중의 환호에 응답하는 격한 현대 전사들의 UFC격투기의 장면이, 짜고 치는 프로레슬링의 야만스러운 해학이, 찰리 채플린의 코믹하고도 우울한 제스처가 함께 뒤섞여 있기도 하다. '돈'이 야기한 신자유주의의 그늘은 이전의 참담한 역사조차도 상업화한다. 그렇다. 어느 시대에나 돈이란, 마치 빌리 할리데이가 부른 또 다른 노래의 가사처럼, 우리에게 "나뭇잎과 뿌리가 피로 물든" 나무에서 열리는 "이상하고도 쓰디 쓴 열매"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타락의 길로 우리를 유혹하는 낙원의 선악과인 것이다.  우울하고 처연한 영상 밑으로 전시장 바닥에는 실제의 10원짜리 한국 동전과 대만 동전들이 무더기로 쌓여있다. '돈 무더기'이다. 70만원에 이르는 분량의 동전들이 조명을 받아 반짝이는 가운데 금빛 장난감 포크레인이 무더기로 쌓여 있고, 3대의 포크레인이 연신 기계음을 내며 움직인다. 관객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센서에 의해 비로소 작동하는 포크레인은 자기 본연의 업무를 지속한다. 흩어진 동전들을 하염없이 담으려고 버둥거리지만, 동전들은 자꾸 미끄러져간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작업에서 자주 사용하는 하나의 은유이다. 장남감 포크레인은 개발 지상주의를 발전으로 착각하는 이 시대의 지도자, 경제논리에 골몰하는 지배세력을 은유한다. 일예로, 폐쇄카메라를 통해 장난감 포크레인을 촬영하고 실시간으로 벽면에 거대한 움직이는 그림자로 드리운 그의 이전의 영상, 설치작업은 하나의 은유임과 동시에 역설이다. 작품은 포크레인으로부터 당시의 한국적 상황을 관객에게 떠올리게 만들면서도 '기도(prayer)'라는 제목으로 인해 소원/비판, 기도/저항과 같은 대립적 개념을 관객에게 혼성된 무엇으로 인식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번 작품에서도 장난감 포크레인은, 이 시대의 지배계급에 대한 '은유'이자, 비판적 저항 메시지 자체를 희화시키고 풍자하는 '역설'이기도 하다. 포크레인이 동전 하나 제대로 끌어올리지 못하면서도 연신 굉음을 내며 허우적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원일이 기획한 한 국제전에 참여했던 그의 또 다른 작품' 역시 장난감 롤러코스트를 화면에 확대 프로젝션한 후 시계의 초침과 대비시켜냄으로써, '빠름/느림'이라고 하는 "20세기의 시간의 의미에 꿈과 허상의 의미를 대비"시키는 서사를 통해 역설을 실천한 바 있다. 이원일은 한 서문에서 이경호의 이러한 대비적 서사에 근거한 역설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작품 〈디지털 달(Digital Moon)〉을 해석하면서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교감을 추구한 "꿈과 카오스의 이중주"로 이어지는 끝없는 긍정과 부정이라고 하지 않았던가?"이경호의 새로운 디지털 작업들은 (중략) 변형과 침묵 사이의 유연한 중개적 과정을 디지털 이미지 프로세싱으로 접근하여 자아와 세계의 비선형적, 불가해적 신비의 영역을 탐험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부단한 자기갱신과 확장의 예술적 실천이다. 모니터 공간 속에서 완전히 환원되거나 흡수될 수 없는 불확정성의 세계, 의사환경 속에서 변질된 사이버자아(Cyber-self)의 표류의 시선을 통해 오히려 흔들리는 세계를 바라보려 하는 꿈과 카오스의 불안한 이중주 말이다."이번 전시 전면에 나서고 있는 '돈' 역시 그 자체로 역설이다. '돈'이 우리에게 독려하는 행복한 삶과 돈이 유혹하는 화려한 삶 앞에서 우리는 좌절한다. 있음/없음 사이에서, 행복/불행 사이에서 말이다. 그것은 돈이 있음으로 행복을 성취하는 것이 아닌, 돈이 있음으로 불행할 수 있는 인간 삶의 컨텍스트마저 여실히 드러낸다. 돈이 유혹하는 행복과 화려함 이면에 처절한 지배/피지배의 역사가 반복될 뿐이기 때문이다. 엄청난 양의 '돈'이 야기하는 '대박'은 언제나 실현성이 희박한 가정일 따름이지만, 간혹 우리의 삶에 들어와 우리의 일상을 훼방한다. 그것은 순전히 우리에게 행복으로부터 불행으로 가는 지름길을 제공할 뿐이니까 말이다. 이처럼 '대박'은 잔잔한 현대인의 일상 자체에 행복/불행을 가르며 파문을 일으킨다. 그럼에도 '돈'을 위해 오늘도 살고 있는 현대인의 삶은 아이러니 자체이다. 그것은 하나의 역설이다. 이원일의 ‘창조적 역설’이 모순, 아이러니, 유희, 풍자, 반서사와 같은 탐 콘레이의 '창조적 역설'의 개념들과 공유하는 것이라면, 이경호의 그것에 대한 재해석과 실천은 다분히 유희적이고, 풍자적이다. 그는 동전이 가득 쌓인 바닥에 물그릇을 하나 놓아두고 있는데 이경호는 그곳에 관객들이 2층으로부터 동전들을 던져 넣게 유도하고 있다. 마치 로마를 찾는 관광객이 트레비 분수(Fontana de Trevi)에 동전을 던져 넣으면서 자신의 소원을 비는 것처럼, 작가는 이번 전시를 찾는 관객들이 물그릇에 동전을 던져 넣으면서 저마다의 소원을 빌어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자신이 만든 '돈밭'에 관객들의 유희적 참여를 도모함으로써 돈과 관련한 '역설적 메시지'들이 보다 더 가시화되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동전 안에 모인 돈들을 따로 모아 시각장애인 단체에 기부할 계획까지 가지고 있는데, 그러한 까닭은 그가 1999년 전시 준비 중에 용접 작업을 하다가 눈에 화상을 입어 하루 동안 시각장애인 체험을 본의 아니게 한 경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관건은, 일련의 관객 참여를 도모하는 유희적 퍼포먼스가 실천되고 있지만, 그의 '창조적 역설'에 대한 재해석과 실천이 마냥 즐겁고 유쾌하지만은 않아 보인다는 것에 있다. 그의 작업이 표면적으로 유희, 풍자를 내세우고 있음에도 그의 작업 안에는 '단단한 뼈 있는 농담과 풍자'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이러니, 모순 등이 오버랩되어 있는 슬픈 자조와 '상투적인 단어의 의미'를 비트는 비판적 메시지가 그의 작업 심층에서 지속적으로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 이경호(Kyungho Lee),〈Jackpot!>, signle channel video 6m & sensor, coins, Excavator toy, Pot_dimention variable_2014

  • 다보스포럼(제4차 세계경제포럼. WEF), 2014. 1. 22~25, 스위스 다보스

  • 이경호, 작업노트, 2014. 2. 1.

  • Caetano Velose, 〈Ay Amor!〉

  • Billie Holiday, 〈I`m a fool to want you〉

  • Canan Anderson,〈Sultan-i Yegah Sirto〉

  • Billie Holiday, 〈Strange Fruit〉

  • "Blood on the leaves and blood at the root",

  • "A strange and bitter crop."

  • 이경호는 하염없이 같은 원을 그리며 날아다니는 아스트로보이 아톰과 전원이 빠진 방송국 마이크 앞에 슈퍼맨의 화려한 망토를 뺏어 두른 미키마우스(작가는 미치마우스라 명했다) 아래 엄청난 양의 포크레인들이 굉음을 내며 꿈틀거리는 작품을 선보인 바 있다. 전시에 출품된 장난감 포크레인들은 당시 재임 중이던 이명박 대통령의 토목공사가 기반이 된 성장위주 정책을 풍자하고 비판하기 위해 사용한 하나의 은유였다.  - 이경호,〈Michey Mouse 2008-2013〉, 2011, 《아이로봇(i Robot)전》(조선일보미술관, 2011. 1. 7~1. 25,)

  • 이경호,〈Prayer)〉2007

  • 이경호,〈No-Signal(?Help)〉, 2007.  《Thermocline of Art: New Asian Waves》, (Karlsruhe ZKM,  2007. 06. 15.~10. 21.) - Wonil Lee, "Kyung-Ho LEE", in Thermocline of Art: New Asian Waves, 2007. p. 64.

  • 김동건, 이원일과의 인터뷰, <김동건의 한국, 한국인>, 월드 큐레이터 이원일 편, 2008. 7. 7. KBS 2TV.

  • 이원일, "꿈과 카오스의 이중주", 『이경호』, 개인전 카탈로그 서문, (갤러리세줄, 2002, 3. 21~4. 10.)

  • 이경호는 2004년 제5회 광주비엔날레에서도 전시를 통해 생산된 '뻥튀기'를 이탈리아 디자이너 '미우치아 프라다'와 협업하여 디자인한 봉투에 담아 1$에 판매한 후 수익금 전액을 지역 시각장애인단체에 기부한 적이 있다. -이경호,

  • 이경호,〈Yoke〉1999, http://www.youtube.com/watch?v=FtsN4yvFB-4

 

 

"Chaos under Dream"“꿈과 카오스의 이중주 끝없는 긍정과 부정” 2002  


이원일 (미디어 시티2002 서울 전시총감독)



작가 이경호가 꿈꾸고 있는 세계는 불확정성의 세계다. 이는 혼돈 속에 일정한 규칙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면서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불안정한 현상과 같다. 그의 예술은 끊임없는 자기 부정을 통해 부정도 긍정도 할 수 없는 카오스의 세계를 복잡계의 눈으로 직시하고자 하며 합리성의 그늘에 감추어져 있던 신체, 자연, 사회현상의 모순, 대립, 갈등을 진지하게 성찰하고 있다. 그의 작업은 단순히 과학이론과 지식을 예술언어로 예증하는 차원을 넘어 미디어라는 첨단매체를 통해 과학, 철학, 종교, 역사관의 한계를 제시하는 ‘역설’을 보여준다. 가령 고개를 숙이며’Yes’를 내뱉는 이미지와 자신의 뺨을 때리며 ‘No'를 외치는 이미지 컷들을 디지털 방식으로 편집, 조작하여 늘린 후 각기 다른 화면 위에 투사시킨 “카오스”라는 작품은 시간과 공간의 순환적 흐름을 파괴한 후 비선형 동적 시스템으로 변환시켜 복잡함과 잡음 속의 규칙성 반복적으로 드러내주며, 빠름과 느림이라는 예정된 속도 속에 예측 불가능한’정지‘된 시간성을 포치시킴으로써 뉴턴적 절대시간과 공간을 부정하는 카오스적 시공간을 표출시킨다. 거기에 극단적으로 견디기 어려운 규칙적 소음이 가해질 때 그곳에서 상실과 가치부재의 시대가 낳은 아노미 현상의 징후가 목격되는 것이다. 그것은 감각적 질서의 전복현상을 통해 시간의 급진성에 제동을 걸며 궁극적으로 무질서의 공감각적 세계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즉 시각과 청각의 순수 고유지평이 동시에 상실되는 그 세계에서 짐승의 울부짖음에 가까운 인간의 변조된 음성은 차라리 시각을 겁탈하는 청각이 되어버린다. 그렇게 “카오스”는 컴퓨터를 통해 이경호라는 사적인 육체를 위조시킴으로써 정신이 육체를 부정하고 조종하는 초라한 자아의 본질을 노출시킨다. 마치 하임 (M. Heim) 이’가상자아‘를 두고 “육체의 불투명성을 흡수하고, 고깃덩어리를 갈아서 정보를 만들고, 에로틱한 삶은 꼭두각시놀음으로 전락시켜 조종거리로 만든다.”고 했던 것처럼 이경호의 디지털 화된’자아‘는 비밀스런 자기애의 쉼터마저 집어삼켜버리는 자학과 자기혐오의 일단을 드러냄으로써 자아라는’운명‘을 스스로 탕진, 소진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 그러한 점에서’Yes’ 도 ‘No'도 아닌 일견 무의미함을 보이는 그의 작업은 정신이 나간 자, 고독한 자의 중얼거림과도 같은 의미 없는’독백‘을 닮아있다. 그러나 그 맹목적이고 무목적적인 혼돈의 메시지는 종국에는 반사적인 자기존재 처절한 확인작업이다. 왜냐하면 그’중얼거림‘이란 어떤 수신자를 전제하지 않기 때문에 자아를 향한 고독한 부메랑일 뿐인 것이다.

한편 물에 비친 달의 형상을 인터렉티브의 피드백 효과를 통해 증폭시킴으로써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교감을 추구한 “디지털 문”은 매혹적인 푸른 화면위에서 쌍방형성의 변주를 선사한다. 즉 관람객이 푸른빛을 완전히 가리면서 지나갈 때 우주의 빅뱅을 닮은 화면의 폭발이 이루어지며 관람객을 일순간 나르시시즘의 블랙홀, 즉 카오스의 세계를 안내하는 것이다. 거기서 수용자는 감성과 이성, 평상심과 극심한 혼란 사이를 왕래하며 “카오스”작품에서의 정지된 화면과 유사한 정신의 공황상태를 체험하게 된다. 그것은 푸른빛에 의해 풀려버리는 자아의 실종이요, 그러한 탈자아속에서 또다시 자신의 중심을 잡으려 발버둥치는 현기증 나는 카오스적 현실의 반영인 것이다.


그렇게 시공간의 카오스 속에서 이미지와 소리의 통합변조를 통한 복합 감각적 조작 가능성을 극대화시키고 있는 이경호의 새로운 디지털 작업들은 형식 미학적 입장에서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4개의 키워드를 함축적으로 연상시키고 있다. 즉, 활동(action)에서 명료화(clarification), 변형(transformation), 그리고 침묵(silence)의 단계를 반복해서 왕래한다는 의미다. 그러한 변형과 침묵 사이의 유연한 중개적 과정을 디지털 이미지 프로세싱으로 접근하여 자아와 세계의 비선형적, 불가해적 신비의 영역을 탐험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부단한 자기갱신과 확장의 예술적 실천이다. 모니터 공간 속에서 완전히 환원되거나 흡수될 수 없는 불확정성의 세계, 의사환경 속에서 변질된 사이버자아(Cyber-self)의 표류의 시선을 통해 오히려 흔들리는 세계를 바라보려 하는 꿈과 카오스의 불안한 이중주 말이다.

 

 

``우리 시대의 美를 논한다`` 중 발췌 

 

이경호의 작품들 또한 같은 맥락에서 말할 수 있겠다. 이경호의 ‘디지탈문’의 경우에는 관람객의 존재는 작품의 필요충분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이 비로소 작동하는 순간은 관객이 이 작품을 만지는 순간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화면과 카메라 사이의 허공을 무언가가 스치는 순간이 비로소 작품이 완결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카메라에 비친 관람객의 손의 이미지와 프로젝터를 통해서 벽에 투사되는 이미지의 무한 피드백이다. 이 경우에 관람객이 보는 이미지는 자신의 손이면서, 동시에 달이고, 실제로는 카메라와 벽이 만들어낸 무한 반복의 순환 구조이다. 이것 역시 자연의 순환구조를 그대로 차영하고 있으나, 이 경우에는 그 구조가 작품의 전면에 형상화되어 나타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형상은 허상이라고 할 만한 둥그런 영상, 즉 작가가 디지털 문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이런 허상의 형상화는 달빛 소나타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카메라는 뻥튀기 기계를 비추고, 뻥튀기 기계는 달덩어리 같은 뻥튀기를 튀겨낸다. 뻥튀기 기계가 내는 소리는 작가에 의해서 소나타로 이름 붙여진다. 관객은 뻥튀기 기계가 연주하는 소나타를 들으며 달의 대량 생산 과정을 확대 촬영한 영상을 비디오카메라와 프로젝터를 통해서 실시간으로 감상하게 된다. 비단 뻥튀기 기계의 숨겨진 의미를 연상하지 않더라도 이 작품이 노골적으로 구체제의 미학을 비웃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 자신은 능청맞게 달빛소나타일 뿐이라고 서정적으로 ‘뻥’을 친다. 역시 이런 일련의 감상도 그 현장에 참여한 감상자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경호는 이 ‘달빛소나타’를 광주비엔날레에 출품했을 때는 관람객이 프라다 봉지에 뻥튀기를 가져갈 수 있게 하기도 했다.

 

-미디어 작가, 미술평론가 박 진 호-

교수신문 지음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아방가르드 로맨틱

 

박 진 호(화가, 비디오 아티스트)

 

 

아방가르드 로맨틱 이경호를 소개한다.

낭만적인 전위예술가라고 해도 뜻이 통할 것을 굳이 ‘아방가르드 로맨틱’이라고 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전위예술가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는가? 벌거벗고, 소리를 지르고, 붉은 물감 혹은 피를 뿌리고, 광기의 음악, 광기의 북, 뛰고 소리치고, 발광을 하는 이미지가 우선 떠오를 것이다. 좋게 말해서 전위예술가고 나쁘게 말하자면 예술깡패다. 이경호도 어려서 숱하게 칼을 휘두르고, 활을 쏘고, 기타와 텔레비전을 부쉈다. 이런 면에서만 보자면 웬만한 전위보다는 더하면 더했지 덜할 것이 없는 배경을 보여준다. 하지만 로맨틱이라는 수사를 방점 두 서너 개 찍어가며 붙여 부르는 이유는, 그가 사랑했고 또, 지금 사랑하는 것이 커더란 예술지상주의의 고함소리보다는 인간에 대한 노래이기 때문이다.

2006년 4월 갤러리 <세줄>에서 이경호의 두 번째 개인전이 열렸다. 이번 전시의 주제는 여행자. 이경호는 늘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 사람의 모습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경호가 그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전위적이다. 특히 매체를 다루는 방식이 매우 독특하다. 매체를 다룬다는 것은 매체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사람이 백남준이다. 백남준은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피아노를 어떻게 하면 더 잘 다루어 좋은 혹은 다른 음악을 하는가를 생각할 때 그것을 때려 부수는 소리도 듣기 좋다는 것을 보여준 작가다. 백남준은 예술가들의 첨단 매체에 대한  고포를 치료한 사람이다. TV로 조각을 하건 컴퓨터로 축구를 하건 아무 문제될 게 없다. 이경호는 그런 관점에서 백남준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고 그 백남준에게 바치는 작품이 바로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백남준 선생님을 기리며」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올해 쏟아져 나온 수많은 백남준에게 바치는 작품들 중 당연 열 손가락 중에 하나로 꼽힐 만한 작품이다.

어둠 속에 조명 하나가 러닝머신을 비추고 있다. 러닝머신 위엔 고물 바이올린 한 대가 질질 끌려가고 있다. 바이올린이 러닝머신의 고무판에 끌리며 낮은 소리를 낸다.

1961년 뉴욕 브루클린 거리에서 백남준이 바이올린을 줄로 매달아 끌고 다녔던 퍼포먼스「땅에 끌리는 바이올린」을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학생시절 처음으로 한 미술작업이 아끼던 기타에 물감을 채워놓고 TV를 부수는 퍼포먼스였다”는 작가는 존경하는 백남준과 그 퍼포먼스에 대한 오마주로 이 작품을 만들었다. 백남준 대신 바이올린을 끌고 가는 러닝머신은 더 이상 세상에 없는 백남준의 존재감을 부각시킨다. 또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똑같은 일상에 끌려 다니는 우리의 모습은 항상 같은 속도로 입력되어 있는 러닝머신 위의 바이올린과 겹쳐지면서, 바이올린이 끌리며 내는 ‘끽끽~’ 소리는 일상의 노곤함에 지르는 우리의 한숨과 비명 같다. 게다가 복잡한 이론과 개념을 덧입어 일반인들이 접근하기에는 너무 무거워져 버린 ‘현대 미술의 살을 빼자’는 익살까지 담아 현대미술사에 길이 남을 재담가 중에 한 사람인 백남준에 대한 오마주를 마무리한다.

이번 전시에서 이경호는 ‘여행자’를 주제로 이렇듯 러닝머신, 바이올린, 빈 비닐봉투, 버려진 포장마차, 포클레인 등을 가지고 이경호의 주제인 ‘인생’을 이야기한다.

인간 이경호가 인생에 대해 느끼는 것은 작가 이경호가 자신의 작업에 대해 취하는 태도가 실험적인 것에 비해서는 너무나 비현실적일 정도로 소시민적이다. 다만 필자가 이경호의 일련의 작업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런 소시민적인 아이디어를 나름대로 첨단매체라고 하는 비디오 작업과 설치작업을 통해서 구현하는 것, 또 그 구현의 과정에서 비디오카메라와 프로젝터, 오브제 등을 이용하는 방식이 너무나 간단하고 명쾌하여 삶과 예술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는 경지까지 나아간다는 것이다. 이렇듯 이경호가 매체를 다루는 방식은 일견 매우 즉물적이고 즉각적이어서 쉽고 유치해 보이기도 하지만, 전체를 아우르고 조율하는 이경호의 연출력에 힘입어 관객은 순간순간 아하 하고 무릎을 치는 경탄의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이번 전시의 작품은 크게 비디오 설치 4작품으로 이루어진다. 앞서 언급한 백남준을 추모하여 만든 「백남준을 기리며...」같은 공간에 놓여진 「버려진 시간들」이층에 전시된 「여행자」, 그리고 「풍경」.

그 중「버려진 시간들」은 불시에 마주치게 되는 풍경일 수도 있다.

이 작품에서 관객은 자동문이 열리는 짧은 순간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거울 속의 관상동맥은, 2년 동안 버려져 있던 포장마차를 휘감은 나뭇가지로 변화하고, 다시 그 장소에 머물렀던 자들의 그림자로, 기억들로 연결된다.

작가는 전시장의 여러 가지 요소-2년간 방치된 포장마차, 노숙자들의 모습, 포장마차에 비친 취객들의 그림자 영상과 음향, 잡음과 함께 우연히 맞춰진 주파수로 기독교방송이 나오는 작은 라디오, 옛날 화장실 등으로 사용 되었을 법한 작은 붉은 등, 작가의 심장 주변을 관상동맥 조영술로 촬영한 영상-등을 공간 연출하듯 배치시켜 놓았다.

작가는 이 전시를 준비하던 중 심각한 심장질환을 발견하여 전시 시작 이틀 전에 심장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전시를 준비하던 기간이 곧 수술을 준비하던 기간이었고, 자연히 삶과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며 작업을 하게 된 중요한 순간이었다고 한다. 마치 유서를 써내려가듯 마지막 작품일지도 모른다는 심정으로 전시를 준비했다고 하니 입구에서부터 느껴지던 심상찮은 느낌은 그것에 연유한 것이리라. 이런 점이 항상 일정 정도의 유머러스한 요소를 끌어내던 이경호의 종전에 작품들에 비해 증후하게 느껴졌던 이유이리라. 그래서인지 이번 전시에서도 웃음의 요소를 찾아볼 수 있었지만, 즐거워 웃는 웃음이라기보다 페이소스가 담긴 미소로 느껴진다.

2층의 전시는 이경호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작품들로 구성되었다. 제일 먼저 눈을 잡아끄는 것은 이경호의 신작인「풍경」. 이 작품은 이경호의 최근의 대표작인 광주비엔날레의 「달빛소나타」와 연결선상에 있는 작품이다.「달빛소나타」에 대한 유진상의 설명을 들어보자. 

 

이경호가 사용하는 비디오 영사기의 증감효과는 피드백 프로세스와는 또 다른 극적 무대를 만들어낸다. 2004년 광주비엔날레에서 전시한 「달빛소나타」에서 그는 달의 원형을 떠올리는 ‘뻥튀기’를 수없이 많이 만들었다. 자동으로 쌀이 공급되는 뻥튀기 기계가 반복적으로 작동하는 모습을 실시간 영상으로 보여준 이 작품은 한 무더기로 쌓여진 뻥튀기를 관객이 먹을 수 있도록 함으로써 중층적인 의미생산을 이루어내고 있다. 앞의 작업「카오스」와의 연속선상에서 읽히도록 만든 이 작품은 마치 기계가 달을 찍어내는 듯한 유비와 ‘뻥’ 하면서 튀겨지는 파열음의 극적 효과, 그리고 그것을 먹는다는 행위가 연상시키는 종교적 함의-카톨릭의 영성체-혹은 에로티시즘-관객의 신체를 먹는 행위에 개입시킨다는 의미에서- 때문에 현장에 강렬하게 몰입할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을 갖추고 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작가는 감시카메라를 쌀을 누르는 프레스에 근접시켜 촬영하고 이렇게 확대된 이미지를 비디오 영사기를 이용하여 다시 커다랗게 투영하여 드라마틱한 효과를 극대화했다. 비디오 장치의 현재성과 오래된 기계장치의 현재성을 경쟁시키는 이원성은 여기서도 나타난다. 사찰의 타종을 떠올리는 뻥튀기 기계의 반복적인 굉음이 현재에 대한 자각을 강요하는 것이라면 그로부터 튕겨 나오는 것은 역시 원형으로 수북하게 소진되어 쌓여가는 현재의 잔해들이다. 퍼포먼스가 강한 현재진행형이라면 그것의 조각적 표현은 현재를 사물의 형태로 끊임없이 찍어내고 관객이 직접 그것을 먹으며 소진해 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경호의 오래된 기억들」중에서

 

여기에 이경호의 설명을 덧붙이자면,

 

뻥(달)님에게!!! 어렸을 적 달을 닮은 뻥튀기는 나에게 작가적 영감을 가장 많이 준 먹거리  과자였습니다. 역사가 삼사십년 된다고 하니 저와 나이가 거의 비슷합니다. 이런 모양 저런 형태를 입으로 먹고 자르면서 또는 손으로 잘라서 침으로 녹이며 달에다 대어보기도 하고선 여러 형태의 다양한 조각을 만들어 냈습니다. 달이 뜬 밤이면 어머니는 장독대가 있는 대안으로 올라가 정안수에 달을 띄워 놓고 군대 간 형을 위해서 기도를 하고 하셨습니다. 또 뻥 과자는 제가 어릴 때 성당 미사 시간에 나누워 주던 밀떡과도 닮았습니다. 다빈치의「최후의 만찬」을 생각하면서 받아먹었습니다. 그런데 곧 배가 고팠습니다. 미사 전 몇 시간은 공복을 유지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가끔 밀떡이 뻥 과자로 보였습니다. 사라의 빵! 믿는 사람이건 아니건 사랑으로서 서로를 대하자는 게 제 생각입니다. 무척 어려운 일이죠, 저도 가끔 가슴을 칩니다. 여러분에게 사랑의 빵을 나누어드립니다. 전쟁의 폭탄소리가 아니라 평화의 뻥 소리 어릴 적 낭만과 꿈과 사랑을 뻥 소리와 함께 가져가십시오. 이라크로 파병하는 자이툰 부대가 포 쏘는 훈련대신 뻥 과자 튀기는 훈련을 하고 있는 것을 신문 지면을 통하여 보았습니다. 무척 반가운 기사였죠. 실력 없고 정신 나간 타 구단 축구감독의 요청으로 가족들의 끼니 걱정에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주전자 담당 용병 후보들의 모습들처럼 약간은 처량하기도 하면서 아름다웠습니다. 미디어가 뻥만 늘어놓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우연히 선택한 패션쇼에서 가끔 쓰이는 단조 음악에 맞추어 규칙적으로 돌면서 뻥이 터질 땐 묘한 감정이 듭니다. 우리들 인생 같기도 하고 미래의 기계적인 인간복제의 단면을 보는 것 같기도 하면서, 처량하게 쌀이 고압에 연기를 내면서 터져 나오는 뻥들의 쌓인 형태는 널브러진 시체들의 무덤 같기도 하였습니다. 새삼 광주에 고개를 숙입니다. 이 작업은 프라다와 저의 공동 작업입니다. 이름 레벨이 없는 프라다의 가방은 저의 뻥 과자와 동급입니다. 프라다도 저와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는 무인도에 뻥 과자와 프라다 가방이 있다면 우리는 뻥 과자를 위해 싸울 것입니다. 문득 어릴 때 먹을 것을 가지고 누나와 싸운 기억이 납니다. 모든 전쟁도 결국엔 먹을 것 때문에 생깁니다. 서로 잘 적당히 나누어 먹고 살면 좋겠습니다. 내가 더 잘 먹으려고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도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뻥 과자는 관자로 드셔도 되고 작품으로 보관 하셔도 됩니다.

p.s: 올 초 우연히 총신대 앞의 약속장소에서 이 뻥 기계를 만났습니다. 세상에 그냥 우연은 없나 봅니다. 첫 만남에 전기가 왔습니다. 우리의 매순간의 선택과 결정이 또 다른 미래를 만들어 갑니다. 예술은 진짜 발견하는 것일까요? 우연이 과연 우연일 뿐일까요?

2004년 7월 7일 이경호 드림

-「광주비엔날레를 위한 이경호의 작가노트」중에서

 

비평가 혹은 전문가들이 그의 작품에 접근하는 방식과 실제 그가 그의 작품을 대하는 태도는 극적으로 다르다. 바로 이 지점이 필자가 이경호를 아방가르드 로맨틱이라고 부르는 지점이다. 이경호의 시선은 그의 작가노트에서 보듯이 줄기차게 우리네 삶에 집중해 있으나, 그가 작품을 만들어내는 방식은 다분히 실험적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용어 정리를 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우리가 흔히 낭만주의라고 부르는 미술사조는 낭만적인 미술이라는 관습적인 해석으로는 전혀 뜻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들라크루와의 그림이나 제리코의 그림을 단 한 점이라도 본 사람은 그 그림들이 관습적인 의미로 낭만적인 것하고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여기서 같은 그림을 놓고 로마주의 그림이라고 설명해보자. 눈치가 빠른 분들은 이미 필자가 하고자 하는 말이 뭔지 아셨을 것이다. 낭만주의의 원래 명칭은 로마주의다. 문학에서는 관습적인 해석으로의 낭만주의라고 해도 뜻이 통하는 경우도 있지만, 미술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외국에서도 문학과 미술의 개념이 혼동되어 사용되는 경우가 없지 않아 있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그 정도가 심하다. 우리는 로마주의라는 용어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낭만주의에서 로마의 흔적을 읽기란 쉬운 일이 아니고, 낭만주의와 로마주의를 연결시키는 것은 더더욱 무리인 것이다. 그럼 우리에게 낭만주의를 세례한 일본의 경우에는? 당연히 낭만이라고 쓰고 로우만이라고 읽는다. 이글에서는 의미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미술사적인 의미에서의 낭만주의는 로마주의라고 표기하기로 하고, 관습적인 의미로는 낭만주의라고 표기하기로 하겠다. 

우리가 로마주의를 로마주의라고 부르는 이유는 엄정한 질서를 추구한 보자르 드 파리를 중심으로 한 아카데미파의 그림과 그 정치색에 환멸을 느낀 일군의 화가들이 아카데미파가 선택한 그리스 미술의 엄정한 질서에 대한 대안으로 로마미술을 택했기 때문이다.

로마주의의 화가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을 처음 루브르에서 본 순간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 그 생사를 걸고 싸운 15일간의 표류, 그 광기, 인육을 뜯어먹고서라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에 대한 본능, 그 좁은 공간에서 벌어진 양육강식의 구조를 보여주는 구도, 저 멀리 수평선에 떠있는 한 점 희망, 그 구조선을 향해 끊임없이 손을 흔들고 절규했을 사람 들.

 

다시 이경호로 돌아가서, 그의 작품 「풍경」을 보자면, 여기에 수백 개의 불도저와 포크레인이 있다. 여기에 질주하는 자동차와 하이웨이가 있다. 여기에 쉬지 않고 품어내어지는 수증기가 있다. 여기에 금모래 가루가 있고 이 기계들은 쉬지 않고 일년 삼백육십오일 그것들을 퍼 나르고 퍼 담는다. 이 모든 광경들은, 이 집단적인 총체극은 장난감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건 장난이다. 어린아이의 정서를 가지고 있는 어른의 장난이다. 이것이 장난이 아니게 여겨지는 지점은 이것들을 촬영하고 있는 폐쇄회로 카메라와 실시간으로 이것을 영사하는 프로젝터 때문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철없는 장난은 실시간으로 고발되어진다. 더욱이, 그것을 고발하는 영사기를 끊임없이 가로막아서는 것은 다름 아닌 그 장난감 불도저와 포크레인이다. 영사기는 영사기 본연의 임무를 하지 못하고 왜곡된 그림자극의 하수인으로 전락하여 거대하게 부풀려진 기계덩어리들의 그림자들을 벽에 투사한다. 이런 불합리의 순환구조에서 유일하게 벗어나 있는 것은 아스트로보이 아톰. 작가는 아톰을 순수와 동심의 상징이라고 칭하지만, 이 시나리오 안에서 아톰을 그 정도로 낭만적으로 읽을 여력은 내겐 남아 있지 않다. 

이 거대한 실상과 허상이 빗어내는 풍경 앞에서, 그 속도 앞에서 그저 지쳐 의자를 찾을 뿐이었다. 이 작품을 보고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을 떠올린 것도, 이경호를 아방가르드 로맨틱이라 부를 결심을 한 것도 바로 그 의자에서였다.

 

「여행자」에 대해 쓰자니 벌써 마음이 스산해진다. 봄이었지만, 전시실안의 공기는 늦가을 혹은 초겨울을 연상케 했다. 평창동 꼭대기 휑한 전시장의 살풍경한 모습들 사이로 허공을 유영하던 검은 비닐봉지들과 그 기계들의 그림자들, 그 사이를 비집고 울려 퍼지던 밥그릇 걷어 채이는 소리가 아직도 머릿속에서 쨍하고 울리는 듯하다. 

 

악어와 악어새. 밥과 숟가락. 술과 술잔. 깡통과 따개. 카메라와 프로젝터. 모두 연결하는 순간에 이미지가 보인다는 점에서 같다. 특히 카메라와 프로젝터를 연결했을 때만큼 당연한 결과는 흔치 않다. 카메라에 보이는 영상을  벽에 비춘다. 명쾌하다. 하지만, 카메라가 찍을 것이 프로젝터가 0.00001초 뒤에 벽에 비출 것이라면, 게다가 카메라는 그것을 비틀어 찍는다면 결과를 예측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시간과 공간의 비틀림이 가져오는 것은 완전한 원이다. 이것을 이경호는 디지털 문이라고 불렀으나, 이번 전시에서는 이 달 앞을 지나다니는 수많은 여행자들이 있었다. 카메라와 프로젝터의 피드백에 의해서 생긴 달이라는 영상은 여행자라고 불리 우는 수많은 불청객-검은 비닐봉지-에 의해 무한히 변신한다. 이 여행자들이 우연히 이곳을 지나는 것은 아니다. 여행자들은 알지 못할 힘에 떠밀려 왔을 테고 이 여행자들을 떠밀었던 선풍기들 또한 영문도 모르고 이경호의 작업에 동원 되었을 것이다. 이경호가 이 모든 광경의 배후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경호의 뒤에서 이경호를 관장하는 존재를 깨닫는 순간, 나 역시 내 뒤를 돌아보게 되고 다시 고개를 돌려 눈앞의 광경을 보게 되면 모든 것들이 심상찮아 보이기 시작한다. 이경호의 말마따나 “우연이 과연 우연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선풍기, 비닐봉지, 장난감, 가습기, 포장마차, 러닝머신, 바이올린 이런 것들이 이경호의 작품에 등장하는 것들이다. 그저 등장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것들이 바로 이경호가 그리는 그림의 물감이요 캔버스다. 우리에 삶의 희노애락, 더 나아가서 삶과 죽음을 담아내기 위해 그가 사용하는 도구들이라는 것이 이렇듯 흔히 보는 물건들이다. 이런 일상의 잡동사니들을 가지고 이경호는 예술의 최전선에서 삶을 빚어내고 있다.

                                             

"Chaos under Dream"“꿈과 카오스의 이중주 끝없는 긍정과 부정” 2002  

“꿈과 카오스의 이중주 끝없는 긍정과 부정”이원일 (미디어 시티 서울 전시총감독)작가 이경호가 꿈꾸고 있는 세계는 불확정성의 세계다. 이는 혼돈 속에 일정한 규칙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면서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불안정한 현상과 같다. 그의 예술은 끊임없는 자기 부정을 통해 부정도 긍정도 할 수 없는 카오스의 세계를 복잡계의 눈으로 직시하고자 하며 합리성의 그늘에 감추어져 있던 신체, 자연, 사회현상의 모순, 대립, 갈등을 진지하게 성찰하고 있다. 그의 작업은 단순히 과학이론과 지식을 예술언어로 예증하는 차원을 넘어 미디어라는 첨단매체를 통해 과학, 철학, 종교, 역사관의 한계를 제시하는 ‘역설’을 보여준다. 가령 고개를 숙이며’Yes’를 내뱉는 이미지와 자신의 뺨을 때리며 ‘No'를 외치는 이미지 컷들을 디지털 방식으로 편집, 조작하여 늘린 후 각기 다른 화면 위에 투사시킨 “카오스”라는 작품은 시간과 공간의 순환적 흐름을 파괴한 후 비선형 동적 시스템으로 변환시켜 복잡함과 잡음 속의 규칙성 반복적으로 드러내주며, 빠름과 느림이라는 예정된 속도 속에 예측 불가능한’정지‘된 시간성을 포치시킴으로써 뉴턴적 절대시간과 공간을 부정하는 카오스적 시공간을 표출시킨다. 거기에 극단적으로 견디기 어려운 규칙적 소음이 가해질 때 그곳에서 상실과 가치부재의 시대가 낳은 아노미 현상의 징후가 목격되는 것이다. 그것은 감각적 질서의 전복현상을 통해 시간의 급진성에 제동을 걸며 궁극적으로 무질서의 공감각적 세계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즉 시각과 청각의 순수 고유지평이 동시에 상실되는 그 세계에서 짐승의 울부짖음에 가까운 인간의 변조된 음성은 차라리 시각을 겁탈하는 청각이 되어버린다. 그렇게 “카오스”는 컴퓨터를 통해 이경호라는 사적인 육체를 위조시킴으로써 정신이 육체를 부정하고 조종하는 초라한 자아의 본질을 노출시킨다. 마치 하임 (M. Heim) 이’가상자아‘를 두고 “육체의 불투명성을 흡수하고, 고깃덩어리를 갈아서 정보를 만들고, 에로틱한 삶은 꼭두각시놀음으로 전락시켜 조종거리로 만든다.”고 했던 것처럼 이경호의 디지털 화된’자아‘는 비밀스런 자기애의 쉼터마저 집어삼켜버리는 자학과 자기혐오의 일단을 드러냄으로써 자아라는’운명‘을 스스로 탕진, 소진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 그러한 점에서’Yes’ 도 ‘No'도 아닌 일견 무의미함을 보이는 그의 작업은 정신이 나간 자, 고독한 자의 중얼거림과도 같은 의미 없는’독백‘을 닮아있다. 그러나 그 맹목적이고 무목적적인 혼돈의 메시지는 종국에는 반사적인 자기존재 처절한 확인작업이다. 왜냐하면 그’중얼거림‘이란 어떤 수신자를 전제하지 않기 때문에 자아를 향한 고독한 부메랑일 뿐인 것이다.한편 물에 비친 달의 형상을 인터렉티브의 피드백 효과를 통해 증폭시킴으로써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교감을 추구한 “디지털 문”은 매혹적인 푸른 화면위에서 쌍방형성의 변주를 선사한다. 즉 관람객이 푸른빛을 완전히 가리면서 지나갈 때 우주의 빅뱅을 닮은 화면의 폭발이 이루어지며 관람객을 일순간 나르시시즘의 블랙홀, 즉 카오스의 세계를 안내하는 것이다. 거기서 수용자는 감성과 이성, 평상심과 극심한 혼란 사이를 왕래하며 “카오스”작품에서의 정지된 화면과 유사한 정신의 공황상태를 체험하게 된다. 그것은 푸른빛에 의해 풀려버리는 자아의 실종이요, 그러한 탈자아속에서 또다시 자신의 중심을 잡으려 발버둥치는 현기증 나는 카오스적 현실의 반영인 것이다.그렇게 시공간의 카오스 속에서 이미지와 소리의 통합변조를 통한 복합 감각적 조작 가능성을 극대화시키고 있는 이경호의 새로운 디지털 작업들은 형식 미학적 입장에서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4개의 키워드를 함축적으로 연상시키고 있다. 즉, 활동(action)에서 명료화(clarification), 변형(transformation), 그리고 침묵(silence)의 단계를 반복해서 왕래한다는 의미다. 그러한 변형과 침묵 사이의 유연한 중개적 과정을 디지털 이미지 프로세싱으로 접근하여 자아와 세계의 비선형적, 불가해적 신비의 영역을 탐험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부단한 자기갱신과 확장의 예술적 실천이다. 모니터 공간 속에서 완전히 환원되거나 흡수될 수 없는 불확정성의 세계, 의사환경 속에서 변질된 사이버자아(Cyber-self)의 표류의 시선을 통해 오히려 흔들리는 세계를 바라보려 하는 꿈과 카오스의 불안한 이중주 말이다.

 

 

 

혼란과 혼돈속에서 견인되는 각성의 프로젝션

 

이 원 일 (2007 ZKM 아시아 현대미술전 총감독)

 

이경호는 최근 오브제를 프로젝션으로 투영하여 극적인 시간, 공간의 증식을 통해 전시공간을 형이상학적인 메타픽션의 공간으로 진화시키는 설치작업을 선보여왔다. 이번 ‘No-Signal’ 작업은 그가 필자와 함께 광주비엔날레, 타이페이 MOCA, 상하이 비엔날레 등 국제무대에서 선보였던 일련의 프로젝션 시리즈의 연장선상에서 금년 6월 독일 ZKM 아시아 현대미술전에 출품할 작품을 미리 국내에 선보이는 보고전의 성격을 갖는다.

 

‘No-Signal’은 작가가 태어나서 교육받고 유학한 후 현재까지의 생을 영위해 온 아시아 속의 한국인으로서의 역사의식과 삶에 대한 성찰이 농축되어있는 작품으로 다가온다. 다시 말해서 필자의 눈에 비치는 설치공간은 찰리 채플린의 시계였던 ‘모던 타임즈’의 실존적 위기의식에서 모더니즘 (서구, 비서구의 모더니티)의 ‘일방통행’을 거쳐 예술의 자기목적성에 대한 심각한 ‘회의’ 까지를 암시하는 ‘부재’, ‘고갈’, ‘소진’, ‘공허함’의 막다른 골목을 응시하게 한다. 아니 어쩌면 그의 벽면에 확대 프로젝션되어 흘러가고 있는 시간은 살바도르 달리의 녹아내린 시간에서 오늘 그의 삶의 실낱 같은 ‘희망’의 시간까지를 관통하는 ‘20세기’ 자체의 애처로운 프로젝션의 총체극일지도 모른다.

 

힘겹게 끌어올려지는 구슬과 덜그럭거리는 장난감 동력장치, 그리고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굉음으로 순환하는 놀이동산의 오브제 구조물은 허무한 20세기 문명의 피로감을 공허하게 투영하고 있다. 미하일 바흐친이 언급한 바와 같은 ‘문지방에 선’ 시간이요, 매슈 아놀드가 지적한 ‘한 세계는 이미 사멸되고 다른 세계는 아직 새로이 태어나기에는 무력한’ 21세의 고뇌와 후회, 불길함의 호소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경호는 ‘No-Signal’을 명명하며 가끔 인생의 전원을 ‘끄고(Signal off)’ 싶다는 충동을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프로젝터를 생명장치로 비유할 때 ‘No-Signal’은 동공의 변화 없음과 같은 모니터의 무반응, 생명의 멈춤, 곧 시간의 정지를 의미한다.

그렇게 이경호의 개념적 서사구조는 무거운 미장센의 연출과 비장감을 더하는 음향효과를 통해 비극적 상실감을 일차적으로 보게 한다.

그러나 결국 그의 연출이 시인 보들레르와 같은 허무주의의 늪에서 종료되지는 않는 일말의 단서는 ‘No-Signal’에서 또다시 ‘Signal on (재생)’을 꿈꾸는 실낱 같은 소망에 있을 것이다. 그의 프로젝션 화면 속에서 영화 ‘자이언트’의 저녁 노을 속의 석유시추동력장치를 연상시키는 노스텔지어가 마르크스의 유토피아적 건설의 역사주의, 프로이트의 금욕적 독재주의와 중첩되는 중층적 이미지들로 오버랩될 때, 필자는 그곳에서 작가의 간절한 소망이 모더니티를 관통해 온 고유한 ‘합리성’을 힘겹게 가격하고 있으며, 눈앞으로 굴러 떨어지는 구슬 이미지가 허무한 행동주의를 연상시키며 권위와 중심에 대한 갈망을 지워대고 있음을 목격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없는 ‘현재’에 대한 애착과 미련이 함께 굴러 떨어짐을 응시하게 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실제세계 (장난감)와 창조된 세계 (시뮬라크라적 허구, 상상적 시공간)의 경쟁적, 순차적 대비가 현재적 시간의 끝없는 자기반영으로 메타픽션화 되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난감 오브제들의 유희적 요소에서 출발한 중층적 이미지 작동시스템은 노스텔지어와 초자연적 에너지, 문명의 거대함, 헤겔류의 압도적 서브라임 (Sublime)을 종횡무진 왕래하는 극도의 혼돈과 혼란의 ‘몽환적’ 미장센의 무대를 연출하며, 결국 현재라는 실시간 (real-time)을 각성(skepticism)과 재고의 시간으로 끝없이 되감으며 그것을 허무한 영원으로 순환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경호의 오래된 기억들

 

계원조형예술대학/ 미술비평  유진상

 

비디오 장치가 지니고 있는 탁월한 점 가운데 하나는 퍼포먼스의 공간에 직접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머스 커닝햄이나 트와일러 타프(Twyla Tharp) 같은 이들은 처음부터 비디오가 춤을 추는 신체가 점유하는 공간 속을 이동하는 시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무용가들이다.  시선의 유동성에 대한 의식이 카메라의 경량화와 시스템의 독립에 의해 퍼포먼스, 즉 공연적 요소의 증식을 가속화하였다면 그것을 떠받치는 무대 역시 시선의 과녁이 아닌 편재적(omnipresent) 시선장치로 진화했다.  눈은 어디에서든지 뜨여질 수 있다.  눈이 나타내는 것은 단순히 대상에의 응시를 넘어서서 그것의 위치가 지닌 의미를 지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비디오 장치의 사용은 공간에 새로운 함축, 즉 바라보는 것의 위치와 보여지는 것의 위치가 어떻게 설정되어 있는가에 대한 미술을 만들어낸다.  다른 한편 비디오 영사기의 활용은 현재의 무대화, 그것의 증감, 시선의 편재에 준하는 극적 공간의 편재라는 새로운 범주의 연출적 요소들을 만들어냈다.  현재의 무대화란, 실시간으로 기록된 것을 재생하는 비디오 영사기의 능력을 말하는 것이며, 이것은 바로 카메라의 감시장치로서의 기능과 직결된다.  카메라와 직접 연결되어 투영된 이미지는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재생된 것이지만 그것은 현재로 간주된다.  기록/재생의 과정이 인식되지 않는 것으로 인정되는, 즉 실시간(real-time)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현상은 비디오 장치가 지니는 매우 중요한 특이성이기도 하다.  이경호의 작품 <디지털 문>는 피드백 프로세스, 즉 비디오의 실시간 기록-재생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시간차의 현상을 이용한 작품이다.  주로 카메라에 연결된 TV화면을 기록하는 방식으로 자주 활용되던 이 현상은 이경호의 경우에는 비디오 영사기에 의해 흰 벽 위에 투영된 빛을 촬영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단순히 TV화면과 비디오 영사기에 의해 비추어진 빛의 차이라고 생각할 수만은 없는 중요한 전환을 일으킨다.  카메라에 연결된 비디오 영사기가 투사하는 빛은 주변의 광량과 움직임에 따라 조절 가능한 빛의 얼룩으로 형성되면서 모니터의 사각형 안이 아닌 실제 공간의 연속성(continuum) 위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경호가 만들어내는 둥근 원형의 빛은 조정된 구체적 형태라는 점에서 사물과 다름이 없으며, 이런 점에서 조각적인 형식을 띤다.  <디지털 문>는 조각적 양방향성과 시적 연출을 통해 공간을 두 개의 현재적 레이어로 만든다.  하나는 현재를 수없이 많은 원형의 단면들로 가시화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현재를 ‘달’이라는 구체적 대상으로 명명함으로써 연극적 소격의 장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현재는 공간 위를 떠도는 현재적 단면들의 연속으로 지각된다.  그리고 그것은 관객들이 직접 만지고 변형시키며, 때로는 공간 속에 파편화시킬 수 있는 사물이기도 한 것이다.  비디오 장치가 허용하는 시선의 유동성은 피드백 프로세스에 있어서는 장치 자체의 유동성으로 바뀐다.  그것은 장치의 위치를 그것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와 일직선상에 고정시킴으로써 내파(內波) 혹은 내파(內破)를 일으키는 것이다.  내파의 응결된 형태인 원형은 언제라도 벌어질 수 있는 외부로부터의 개입에 대해 때로는 예민하고 부드럽게, 때로는 격렬한 형태로 반응한다.  이경호가 사용하는 비디오 영사기의 증감효과는 피드백 프로세스와는 또 다른 극적 무대를 만들어낸다.  2004년 광주비엔날레에서 전시한 <달빛 소나타>에서 그는 달의 원형을 떠올리는 ‘뻥튀기’를 수없이 많이 만들었다.  자동으로 쌀이 공급되는 뻥튀기 기계가 반복적으로 작동하는 모습을 실시간 영상으로 보여준 이 작품은 한 무더기로 쌓여진 뻥튀기를 관객이 먹을 수 있도록 함으로써 중층적인 의미생산을 이루어내고 있다.   앞의 작업 <카오스>와의 연속선상에서 읽히도록 만든 이 작품은 마치 기계가 달을 찍어내는 듯한 유비와 ‘뻥’하면서 튀겨지는 파열음의 극적 효과, 그리고 그것을 먹는다는 행위가 연상시키는 종교적 함의 -카톨릭의 영성체- 혹은 에로티시즘 -관객의 신체를 먹는 행위에 개입시킨다는 의미에서- 때문에 현장에 강렬하게 몰입할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을 갖추고 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작가는 감시카메라를 쌀을 누르는 프레스에 근접시켜 촬영하고 이렇게 확대된 이미지를 비디오 영사기를 이용하여 다시 커다랗게 투영하여 드라마틱한 효과를 극대화했다.  비디오 장치의 현재성과 오래된 기계장치의 현재성을 경쟁시키는 이원성은 여기서도 나타난다.  사찰의 타종을 떠올리는 뻥튀기 기계의 반복적인 굉음이 현재에 대한 자각을 강요하는 것이라면 그로부터 튕겨 나오는 것은 역시 원형으로 수북하게 소진되어 쌓여가는 현재의 잔해들이다.  퍼포먼스가 강한 현재진행형이라면 그것의 조각적 표현은 현재를 사물의 형태로 끊임없이 찍어내고 관객이 직접 그것을 먹으며 소진해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퍼포먼스로 이루어진 비디오 장치에서 출발하여 기계를 이용한 조각장치에 이르는 이경호의 작업과정은 그다지 예외적인 것은 아니다.  어쩌면 매우 필연적인 전개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신체가 개입하는 극적 공간에 비디오 장치를 연결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인과관계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결이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사실상 그다지 낙관적으로만 말할 수는 없다.  백남준 이래로 많은 비디오 작가들이 거의 대부분의 가능성들을 실험해 버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 가지는 비디오와 신체의 이항(dichotomy)이 지니는 전형성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일상에서 찍는 비디오의 대부분은 신체를 향해 겨누어진 것들이다.  퍼포먼스와 기록의 과정은 사실상 비디오가 개념적인 소멸을 겪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이것이 발전적으로 전개된다는 것은 더 이상 비디오 장치에 대한 자기지시적이고 개념적인 퍼포먼스를 의미하지 않는다.  아마도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퍼포먼스로 출발한 비디오 기록과정이 작품들의 계열적 진화의 과정에서 개념적 서사로 전개되는 방식일 것이다.  즉 카메라와 비디오 영사기의 연결에서 파생된 실시간 프로세스가 기계적 반복을 통해 파생되는 사물과 그것의 현재적 경험에 의해 역으로 지시되는 과정이 그것이다.  수많은 장난감 포크레인과 불도저들을 모아 작동시켜 놓은 <풍경>은 키네틱(kinetic) 오브제들과 감시카메라 그리고 비디오 영사기, 조명 등을 동시에 사용한다는 점에서 앞서의 <달빛 소나타>와 연결되는 작품이다.  퍼포먼스를 통한 현재적 진행이 기계적 과정으로 대치되는 것도 연속성을 띠고 있다.  이 작품은 카메라와 영사기의 개수를 늘리면서 극적 공간을 증식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는 점에서 편재성이 강조되어 있다.  장 팅겔리(Jean Tinguely)를 연상시키는 그림자 놀이와 실시간 비디오 영상이 동시에 진행되고, 그 위에 모터들의 소음이 증폭되어 있어 원근이 서로 다른 계열에 따라 병치되어 있는 것도 앞서의 작품에서 사용한 증감효과를 그대로 이어나가고 있다.  이 작품은 <카오스>와 함께 전시되는 것으로 다소 형이상학적인 ‘달’의 풍경과 대구(對句)를 이루면서 지상의 풍경을 보여준다.  이 설치작업 전체는 <여행자>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데 아마도 이것은 퍼포먼스 작가로서 미술을 늦게 시작한 이경호에게 있어 처음으로 자신이 창작과의 관계 속에서 정체성을 느끼기 시작하던 시기와 연관되지 않을까 한다.  현재가 떠올리는 복합적인 관념들과 지상의 풍경, 여행자가 경험하는 끊임없는 풍경의 경과 등이 이 총체극에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카메라의 위치를 아주 낮은 곳에 위치시킴으로써 피사체를 증폭시키면서 동시에 기록된 이미지를 역시 낮게 위치한 비디오 영사기를 통해 벽에 투영하는데, 이때 비디오 영사기는 이미지를 투영함과 동시에 또 다시 피사체의 그림자를 생성시키는 조명장치, 즉 광원으로 기능한다.  대상의 이미지와 그것의 그림자를 동시에 생성시키는 장치로 비디오 영사기를 사용하는 것은 앞서 <카오스>에서 비디오의 자기지시적 메커니즘에 의해 생성되었던 피드백 이미지와 유비를 이룬다.  여기서도 두 개의 영상은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생성되는 동일한 현재의 두 가지 양상이다.  움직이는 포크레인의 그림자와 영상들이 무수히 겹쳐지는 벽면의 혼란스러운 소요(騷擾)로 인해 관객들은 현재의 흐름과 그것의 차이들을 그냥 지나쳐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맞은편에 투영되어 있는 ‘달’은 본래의 개념적 착안점들이 어디에 있는지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약간의 유머를 보탠, 이 풍경들 위를 날아다니는 우주소년 아톰을 보고 있노라면 ‘원자’라는 이름의 이 캐릭터가 전체의 풍경에 부여하는 미분적 차이의 스케일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비트’가 아니라 아톰인 것도 말이다.이경호의 퍼포먼서(performancer)로서의 배경은 간혹 그의 작품에 있어 몇 가지를 놓치게 하는 역할을 한다.  표현적인 작업방식이라거나 단순한 오브제의 차용, 소음 등은 그의 작품을 격정적이고 감성적인 내용으로 이해하게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살펴본 일련의 작품들의 전개과정 속에는 현재성, 이항, 차이 혹은 차연(差延), 유비, 각성적 순간 등의 관념들이 순차적으로 정돈되어 드러나고 있다.  특히 비디오 장치를 이들 개념들의 의미관계 속에서 재배치하는 과정은 눈여겨 볼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그가 스스로 밝히고 있는 에피소드 속에서 백남준을 거론하는 부분도 흥미롭게 거론할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 비디오가 아니라 퍼포먼스라는 영역에서 백남준을 동경했다는 고백은 그의 작품들을 이해하는데 단초가 되기 때문이다. 백남준을 알기전 처음으로 학생 시절에 그가 한 작업은 그가 아끼던 기타를 물감으로 채워놓고 부수는, 플룩서스 퍼포먼스에 가까운 것이었다.  퍼포먼스가 집약하는 현재적 순간들의 부각과 그것을 위한 극적 공간은 그의 작업에서 지속적으로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그가 백남준에게 바치는 헌정인 <백남준 선생을 기리며>, 즉 런닝 머신 위에서 끝없이 끌려가는 바이올린은 그가 자신의 스타일로 해석한 흥미로운 백남준에 대한 기억으로서, 한동안 감상할만한 작품이다.  

 

 

 

" 리 장군 "  

 

(거기에)있을까 ? 돈이 있었던곳에.

(거기에)있을까 ? 기계들이, 텔레비젼들이, 진공 청소기들이,

불꽃들이, 소리들이, 소음들이, 종들이 있을 것이고,
 
내일엔 불도져들이, 헬리콥터들이, 기차들이 있을것이다.

언젠가 이 지구에 계획된 가상의 외계 침략이 있을 것이다.

(거기에)있지 않을 것이다 ? 꽃도, 과일들도, 나무잎도, 나무가지 하나 없는것이.

소유가 있을 것이고 결핍이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여기엔 자연 부재의 공간이 있을 것이다. 보다 더 정열적인

무대를 위해 면밀하게 불살라버린 이 지구(흙)에 부족함이 있을 것이다.

결국, 공간의 남긴흔적 뒤로 시간과 육체의 등장이 있을 것이다.

기계들이 의미를 삼켜버리고, 세상을 먹어 치우는 한편,

종이 상자, 욕조 그리고 비너스와 다이아나의 사수는 탄생한다.

존재와 이 세상에 나지 않음에 대한 퍼포먼스.

모니터의 눈속으로 향하는 화살.

태어 나기 그리고 악을 박멸하기

경호 리, 작은 병사여

부디 몸 조심 하시요.

                                 Michel Enrici

 

           

 

 

작가노트  

 

욕조 속 우주

하수구로 향하는 목욕탕 배수구 안에서 우주를 발견한다.

목욕탕안 반사된 하얀 빛을 향해 무언가를 찾아 죽음을 맡기러 온 수 많은 벌레들

배수구 밖의 화려한 무언가로 향하는 알수없는 벌레들이 볼 수 있는 장님인 나약한 인간들의 모습들과 교차된다.

몸을 씻기고 어머니의 양수와도 같은 물 안에서 생명을 발견한다.

우리는 어디로 사는가?

고요한 세상의 기도

 

 

여행 중 아니면 삶의 작은 부분 속에서 우연히 길을 가다 인상적인 순간들을 가슴에 저장한다. 상상으로든 사진으로든 물건으로든 그 기록물을 수집한다 지나온 것과 보여지는 것 그 자리에 있는 것 버려진 것들이 나의 잠재의식 속의 무언가를 건드린다. 공간을 상상하거나 조형이 눈에 들어온다. 다음은 실행이다.

그날은 확실하지 않지만 마음에 담아두고 스케치 하는 것도 있고 현장에서 답을 찾아 결과물로 매치 시키는 작업도 있다. 분명한 것은 무언가 이유가 있기 때문에 나의 눈에 들어 온 것이고 난 그 이유를 찾기 위해 안테나를 세우고 집중해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서성이고 건드리고 이래저래 미장센을 해 보면 결과물들에서 해답을 찾곤 한다.

주제는 인생이다. 삶과 죽음 처음과 끝 그래서 무수히 많은 이야기 거리가 생긴다. 언제나 미완성으로 살다가 죽어갈 것이기 때문에 답은 알아도 정답은 알 수가 없다. 답은 나의 행위로 인해 매 순간 변화한다.

그 동안은 순간들의 목적, 눈앞의 결과들의 목적을 위해 살았다면,

이제는 무엇을 위해 어떻게 누구를 위해서 후회 없이 이 이슬방울같은 생을 살다 갈 것인가 이다.

인생의 지표 정신적인 주파수 사람과 사람들 과의 소통 수단 감정선 잡기 빛을 잡기 위한 도전 하루살이 불나방들이 빛을 향해 뛰어들 듯 우리 인간도 미지의 무채색 빛을 향해 나아간다.

 

2006 8월 25일

 

아이를 통해 그 해답을 찾고있다.

나의 과거였던 우리의 미래들…

기다리고 지나가고 알고 다시 살아나고……

Peter Handke의Song of Childhood가맴돈다…….

 

 

시간의 우연과 운명에 대하여

반복된 삶 어디로 향해 가고 있나…

행위를 시작 하기 전 대충의 시나리오를 쓴다.

생각 덩어리에서 밥 그릇을 떼어 온다…

인생 덩어리인 밥 그릇을 찬다…

생각 덩어리가 엎어 진다…

 

매 순간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한다.

작가로서 가장으로서 한나라의 수장으로서 종교인으로서 경제인으로서

저기 앞에 다가갈 곳이 있고 지나감을 달고 다닌다.

그릇이 엎어지는 순간 게임은 끝이 난다.

 

“아들을 낳고 생각이 바뀌었다. 아들이 곧 미래고 미래를 위하여 난 오래된 과거로부터 진행되어 오지만 바뀌어 가고 있다.”

 

언젠가 나는 끝 나지만 아들의 아들들이 같은 방향을 보고 인류를 위한 삶을 살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양심과 함께하는 사랑을 위하여……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의 하나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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