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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er http://www.neolook.net/archives/20060409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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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호 개인展 2006_0407 ▶ 2006_0528

이경호_풍경(paysage)_혼합재료_가변크기_2006

초대일시_2006_0407_금요일_06:00pm

갤러리 세줄서울 종로구 평창동 464-13번지Tel. 02_391_9171

이경호의 오래된 기억들 ● 비디오 장치가 지니고 있는 탁월한 점 가운데 하나는 퍼포먼스의 공간에 직접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머스 커닝햄이나 트와일러 타프(Twyla Tharp) 같은 이들은 처음부터 비디오가 춤을 추는 신체가 점유하는 공간 속을 이동하는 시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무용가들이다. 시선의 유동성에 대한 의식이 카메라의 경량화와 시스템의 독립에 의해 퍼포먼스, 즉 공연적 요소의 증식을 가속화하였다면 그것을 떠받치는 무대 역시 시선의 과녁이 아닌 편재적(omnipresent) 시선장치로 진화했다. 눈은 어디에서든지 뜨여질 수 있다. 눈이 나타내는 것은 단순히 대상에의 응시를 넘어서서 그것의 위치가 지닌 의미를 지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비디오 장치의 사용은 공간에 새로운 함축, 즉 바라보는 것의 위치와 보여지는 것의 위치가 어떻게 설정되어 있는가에 대한 미술을 만들어낸다. ● 다른 한편 비디오 영사기의 활용은 현재의 무대화, 그것의 증감, 시선의 편재에 준하는 극적 공간의 편재라는 새로운 범주의 연출적 요소들을 만들어냈다. 현재의 무대화란, 실시간으로 기록된 것을 재생하는 비디오 영사기의 능력을 말하는 것이며, 이것은 바로 카메라의 감시장치로서의 기능과 직결된다. 카메라와 직접 연결되어 투영된 이미지는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재생된 것이지만 그것은 현재로 간주된다. 기록/재생의 과정이 인식되지 않는 것으로 인정되는, 즉 실시간(real-time)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현상은 비디오 장치가 지니는 매우 중요한 특이성이기도 하다. 이경호의 작품「Digital Moon」은 피드백 프로세스, 즉 비디오의 실시간 기록-재생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시간차의 현상을 이용한 작품이다. 주로 카메라에 연결된 TV화면을 기록하는 방식으로 자주 활용되던 이 현상은 이경호의 경우에는 비디오 영사기에 의해 흰 벽 위에 투영된 빛을 촬영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단순히 TV화면과 비디오 영사기에 의해 비추어진 빛의 차이라고 생각할 수만은 없는 중요한 전환을 일으킨다. 카메라에 연결된 비디오 영사기가 투사하는 빛은 주변의 광량과 움직임에 따라 조절 가능한 빛의 얼룩으로 형성되면서 모니터의 사각형 안이 아닌 실제 공간의 연속성(continuum) 위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경호가 만들어내는 둥근 원형의 빛은 조정된 구체적 형태라는 점에서 사물과 다름이 없으며, 이런 점에서 조각적인 형식을 띤다.

「Digital Moon」은 조각적 양방향성과 시적 연출을 통해 공간을 두 개의 현재적 레이어로 만든다. 하나는 현재를 수없이 많은 원형의 단면들로 가시화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현재를 '달'이라는 구체적 대상으로 명명함으로써 연극적 소격의 장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현재는 공간 위를 떠도는 현재적 단면들의 연속으로 지각된다. 그리고 그것은 관객들이 직접 만지고 변형시키며, 때로는 공간 속에 파편화시킬 수 있는 사물이기도 한 것이다. 비디오 장치가 허용하는 시선의 유동성은 피드백 프로세스에 있어서는 장치 자체의 유동성으로 바뀐다. 그것은 장치의 위치를 그것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와 일직선상에 고정시킴으로써 내파(內波) 혹은 내파(內破)를 일으키는 것이다. 내파의 응결된 형태인 원형은 언제라도 벌어질 수 있는 외부로부터의 개입에 대해 때로는 예민하고 부드럽게, 때로는 격렬한 형태로 반응한다. ● 이경호가 사용하는 비디오 영사기의 증감효과는 피드백 프로세스와는 또 다른 극적 무대를 만들어낸다. 2004년 광주비엔날레에서 전시한『달빛 소나타』에서 그는 달의 원형을 떠올리는 '뻥튀기'를 수없이 많이 만들었다. 자동으로 쌀이 공급되는 뻥튀기 기계가 반복적으로 작동하는 모습을 실시간 영상으로 보여준 이 작품은 한 무더기로 쌓여진 뻥튀기를 관객이 먹을 수 있도록 함으로써 중층적인 의미생산을 이루어내고 있다. 앞의 작업 「Digital Moon」과의 연속선상에서 읽히도록 만든 이 작품은 마치 기계가 달을 찍어내는 듯한 유비와 '뻥'하면서 튀겨지는 파열음의 극적 효과, 그리고 그것을 먹는다는 행위가 연상시키는 종교적 함의 -카톨릭의 영성체- 혹은 에로티시즘 -관객의 신체를 먹는 행위에 개입시킨다는 의미에서- 때문에 현장에 강렬하게 몰입할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을 갖추고 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작가는 감시카메라를 쌀을 누르는 프레스에 근접시켜 촬영하고 이렇게 확대된 이미지를 비디오 영사기를 이용하여 다시 커다랗게 투영하여 드라마틱한 효과를 극대화했다. 비디오 장치의 현재성과 오래된 기계장치의 현재성을 경쟁시키는 이원성은 여기서도 나타난다. 사찰의 타종을 떠올리는 뻥튀기 기계의 반복적인 굉음이 현재에 대한 자각을 강요하는 것이라면 그로부터 튕겨 나오는 것은 역시 원형으로 수북하게 소진되어 쌓여가는 현재의 잔해들이다. 퍼포먼스가 강한 현재진행형이라면 그것의 조각적 표현은 현재를 사물의 형태로 끊임없이 찍어내고 관객이 직접 그것을 먹으며 소진해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퍼포먼스로 이루어진 비디오 장치에서 출발하여 기계를 이용한 조각장치에 이르는 이경호의 작업과정은 그다지 예외적인 것은 아니다. 어쩌면 매우 필연적인 전개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신체가 개입하는 극적 공간에 비디오 장치를 연결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인과관계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결이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사실상 그다지 낙관적으로만 말할 수는 없다. 백남준 이래로 많은 비디오 작가들이 거의 대부분의 가능성들을 실험해 버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 가지는 비디오와 신체의 이항(dichotomy)이 지니는 전형성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일상에서 찍는 비디오의 대부분은 신체를 향해 겨누어진 것들이다. 퍼포먼스와 기록의 과정은 사실상 비디오가 개념적인 소멸을 겪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이것이 발전적으로 전개된다는 것은 더 이상 비디오 장치에 대한 자기지시적이고 개념적인 퍼포먼스를 의미하지 않는다. 아마도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퍼포먼스로 출발한 비디오 기록과정이 작품들의 계열적 진화의 과정에서 개념적 서사로 전개되는 방식일 것이다. 즉 카메라와 비디오 영사기의 연결에서 파생된 실시간 프로세스가 기계적 반복을 통해 파생되는 사물과 그것의 현재적 경험에 의해 역으로 지시되는 과정이 그것이다. ● 수많은 장난감 포크레인과 불도저들을 모아 작동시켜 놓은 「풍경」은 키네틱(kinetic) 오브제들과 감시카메라 그리고 비디오 영사기, 조명 등을 동시에 사용한다는 점에서 앞서의「달빛 소나타」와 연결되는 작품이다. 퍼포먼스를 통한 현재적 진행이 기계적 과정으로 대치되는 것도 연속성을 띠고 있다. 이 작품은 카메라와 영사기의 개수를 늘리면서 극적 공간을 증식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는 점에서 편재성이 강조되어 있다. 장 팅겔리(Jean Tinguely)를 연상시키는 그림자 놀이와 실시간 비디오 영상이 동시에 진행되고, 그 위에 모터들의 소음이 증폭되어 있어 원근이 서로 다른 계열에 따라 병치되어 있는 것도 앞서의 작품에서 사용한 증감효과를 그대로 이어나가고 있다. 이 작품은「Digital Moon」과 함께 전시되는 것으로 다소 형이상학적인 '달'의 풍경과 대구(對句)를 이루면서 지상의 풍경을 보여준다. 이 설치작업 전체는「여행자」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데 아마도 이것은 퍼포먼스 작가로서 미술을 늦게 시작한 이경호에게 있어 처음으로 자신이 창작과의 관계 속에서 정체성을 느끼기 시작하던 시기와 연관되지 않을까 한다. 현재가 떠올리는 복합적인 관념들과 지상의 풍경, 여행자가 경험하는 끊임없는 풍경의 경과 등이 이 총체극에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카메라의 위치를 아주 낮은 곳에 위치시킴으로써 피사체를 증폭시키면서 동시에 기록된 이미지를 역시 낮게 위치한 비디오 영사기를 통해 벽에 투영하는데, 이때 비디오 영사기는 이미지를 투영함과 동시에 또 다시 피사체의 그림자를 생성시키는 조명장치, 즉 광원으로 기능한다. 대상의 이미지와 그것의 그림자를 동시에 생성시키는 장치로 비디오 영사기를 사용하는 것은 앞서「Digital Moon」에서 비디오의 자기지시적 메커니즘에 의해 생성되었던 피드백 이미지와 유비를 이룬다. 여기서도 두 개의 영상은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생성되는 동일한 현재의 두 가지 양상이다. 움직이는 포크레인의 그림자와 영상들이 무수히 겹쳐지는 벽면의 혼란스러운 소요(騷擾)로 인해 관객들은 현재의 흐름과 그것의 차이들을 그냥 지나쳐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맞은편에 투영되어 있는 '달'은 본래의 개념적 착안점들이 어디에 있는지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약간의 유머를 보탠, 이 풍경들 위를 날아다니는 우주소년 아톰을 보고 있노라면 '원자'라는 이름의 이 캐릭터가 전체의 풍경에 부여하는 미분적 차이의 스케일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비트'가 아니라 아톰인 것도 말이다.

이경호의 퍼포먼서(performancer)로서의 배경은 간혹 그의 작품에 있어 몇 가지를 놓치게 하는 역할을 한다. 표현적인 작업방식이라거나 단순한 오브제의 차용, 소음 등은 그의 작품을 격정적이고 감성적인 내용으로 이해하게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살펴본 일련의 작품들의 전개과정 속에는 현재성, 이항, 차이 혹은 차연(差延), 유비, 각성적 순간 등의 관념들이 순차적으로 정돈되어 드러나고 있다. 특히 비디오 장치를 이들 개념들의 의미관계 속에서 재배치하는 과정은 눈여겨 볼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그가 스스로 밝히고 있는 에피소드 속에서 백남준을 거론하는 부분도 흥미롭게 거론할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 비디오가 아니라 퍼포먼스라는 영역에서 백남준을 동경했다는 고백은 그의 작품들을 이해하는데 단초가 되기 때문이다. 백남준을 알기전 학생 시절에 그가 처음으로 한 작업은 그가 아끼던 기타를 물감으로 채워놓고 TV를 부수는, 플룩서스 퍼포먼스에 가까운 것이었다. 퍼포먼스가 집약하는 현재적 순간들의 부각과 그것을 위한 극적 공간은 그의 작업에서 지속적으로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그가 백남준에게 바치는 헌정인「백남준 선생을 기리며」, 즉 런닝 머신 위에서 끝없이 끌려가는 바이올린은 그가 자신의 스타일로 해석한 흥미로운 백남준에 대한 기억으로서, 한동안 감상할만한 작품이다. ■ 유진상

Vol.20060409a | 이경호 개인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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